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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5. (水曜日, 크리스마스) “어디가 베들레헴Bethléhem인가?”

2024.12.25. (水曜日, 크리스마스) “어디가 베들레헴Bethléhem인가?”

     

지난주 줌복음서 공부에서 <마태복음> 13장에 등장하는 네가지 땅에 떨어진 씨에 관한 비유를 도반들과 함께 읽었다. 예수는 천국에 관한 내용을 비유라는 독특한 이야기 형식을 통해 전달하였다. 영감을 담은 감동적인 이야기만이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떨어져 삶을 지탱하는 큰 나무가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영원하게 만드는 것은 줄거리다. 줄거리엔 시작과 끝이 있으며, 중간에 반전反轉과 자각自覺이 있다. 반전이 없으면 재미가 없고 자각이 없으며 감동이 없다.

     

예수가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12 도반들을 선발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전달한다. 이제 서서히 시간을 통해 매일 늙음을 경험하고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에게 시간을 거슬러 순간을 사는 예술을 가르친다. 삶과 죽음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유유자적하게 살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예수가 귀족이라 아테네나 로마에서 공부한 것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경전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바리새인도 아니었다.

     

그는 ‘목수’로 아버지 생계를 돕는 노동자였다. ‘목수’라는 단어는 ‘테크톤techtōn’이라는 그리스 단어 번역으로, 고장난 가구를 고치며 동시에 사람들에게 집을 설계해주고 건축해주는 팔망미인이었다. ‘테크톤’은 ‘이질적인 것을 엮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 시너지를 낼수 있다는 혜안이 있고,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 테크톤이다. 절대로 결합할 수 있는 것들은 자신을 포기하고 상대방과 하나가 될 때,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동물과 식물은 모두 음과 양의 결합으로 탄생하는 신비다. 생명유지를 유지 가장 근본적인 산소H2O는 수소 2개와 산소 1개의 결합이다. 이 결합이 예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망가진 가구를 고쳐주고, 살만한 집이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착하고 솜씨가 좋은 청년이었다.

     

그가 30세까지 장가를 가지 않는 것은, 기이하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나사렛과 갈릴리 지방에 살면서 동네 사람들이, 살만한 이유를 찾지못한 채,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다. 오늘날 결혼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청년들같다. 창궐하는 전염병과,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로마인들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유린하는 정치-종교 지도자들은 이 청년들을 압사시켜 절망의 죽음으로 몰아가는 괴물들이었다. 그는 자신과 동족들의 고통으로 하루도 잠을 편히 잘 수 없었다. 예수는 요단강에서 천국에 관한 전혀 새로운 이야기,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세례요한을 찾아 가기로 결심했다.

     

세례요한이 예수를 혁명적인 메시아로 바로 인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사두개인이나 바리세인과 같은 종교인이나 학자들에겐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호통을 쳤지만, 예수에게는 자신이 그의 샌달 끈을 묶을 수 있는 자격도 없다고 스스로를 비하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나이는 30살이었지만, 보기에는 50살처럼 보이는 겉 늙은이였다. 그는 마치 죽음을 앞둔 늙은이처럼 보였지만, 눈을 부리부리 사랑으로 불타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모습은 분명 남루하기 그지없는 노동자였지만, 그의 걷는 모습,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깊이 패인 주름, 무엇보다도 작열하는 광야의 햇빛만큼 광채를 내는 남다른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을 한순간에 알아차려 자신과 일치시킬 수 있는 자비의 화신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30살에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요한의 외침을 반복하였다. “정신을 차려, 당신 자신으로 돌아가라. 천국이 이미 가까이 와 있다.”을 반복하면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삶을 시작한다. 흔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진리의 문장을 왜곡되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회개하라’는 라틴어 번역 ‘파이니텐타암 아기테’paenitentiam agite처럼, ‘종교인 앞에서 고해성사하라’라는 말도 아니고, 그리스어 번역 ‘메타노이테’metanoeite처럼 ‘마음을 전환하라’도 아니다. 우리가 본심을 외부의 마음으로 전한할 필요도 없다. 이 문장은 유대 고전 히브리어 문장으로는 ‘슈부’shubu이고 예수가 사용한 구어로는 ‘타부’tabu였을 것이다. ‘슈브’나 ‘타브’는 ‘우리가 각자 되어야 할 인간을 회복하라!’ 혹은 ‘당신의 본심이 숨어있는 양심으로 돌아가 그것에만 복종하라’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천국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고 각성이란 진리란 각 사람안에 존재하고 있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라는 말은 우리가 자신으로부터 부활한다는 의미다. 예수는 이 진리를 아마도 40일동안 광야에서 곡기를 끊고, 절망가운데 살고 있는 보통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자신을 내몰면서 깨달았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닷가에 앉았다. 천국에 관한 새로운 복음을 전하는 그에게 많는 무리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아직 자신을 각성인 개인이 아닌 무리의 일부로 여겼다. 점점 불어나는 무리들을 가르치기 위해 해변에 있는 한 배에 올랐다. 예수는 배에 올라앉았고 사람들은 해변에 서 있었다. 배는 호수의 잔잔한 파도에 흔들리고 해안까지 넘실대는 파도로 예수가 하는 말이 이들에게 전달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예수가 입을 열자 무리와 바다가 잠잠해 졌다. 그는 그들에게 가장 먼저 씨뿌리는 자, 농부에 관한 비유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복음이란 종자種子다. 어떤 어리석은 농부는 씨를 길거리에 뿌린다. 참새와 비둘기가 금방 내려와 씨앗을 먹어 치운다. 다른 어리석은 농부는 씨를 흙이 얕은 돌밭에 뿌린다. 싹이 나오기는 하지만, 뿌리가 깊지 못해 수분을 땅 밑에서 끌어 올리지 못하 금방 말라 비틀어 진다. 또 다른 어리석은 농부는 아무렇게나 가시떨기 위에 씨를 뿌린다. 가시가 싹의 기운을 막아 이내 죽는다. 지혜로운 농부는, 참다운 농부는 씨를 ‘좋은 땅’에 뿌린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농부가 씨앗을 파종하기 전에 해야할 일이 있다. 자신의 땅을 개간해야한다. 그는 자신의 밭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거리가 아니라, 햇빛이 잘 들고 강우량을 적당하게 품고 안개가 자욱한 구별된 땅을 먼저 마련해야한다. 그 구별된 땅이 농부의 땀과 정성으로 자연의 섭리와 신의 도움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농부가 자신의 마음의 밭, 즉 심전을 매일 갈고 닦아야,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밭에서 바위와 자갈을 추려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잡초와 가시들을 제거하여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부드럽고 촉촉한 땅, 즉 ‘옥토’를 마련해야 한다. 복음은 옥토에 떨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복음서는 예수가 ‘옥토’를 의미하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고 기록한다. 당시 유다는 이두메아 출신 헤롯이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치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솔로몬처럼 존경받는 유대왕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가이사리야 항구를 새로 지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헤롯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소식을 저 멀리서 온 조로아스터교 사제인 동방박사들에게 들었다.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서 갓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 사건은 <복음서>에만 등장하기에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인지는 의무이지만, 헤롯의 난폭한 성격을 비추어 보면 개연성도 있다. 그는 인생말년에 전염병에 의한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아들 셋을 반역을 기획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독살하였고 그의 유대 부인이며 하스모니아 마카비 왕가 출신 공주인 마리암네를 죽였다. 그리고 자신이 권위에 도전하는 유대 지도자들을 원형경기장에 몰아넣고 죽이려 했다.

     

이런 1세기 복잡하고 암울한 팔레스티나에서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는 인간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온 예언자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지만, 인간 모두는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신의 형상과 모양을 지는 존재라는 소식을 전하러왔다. 누구나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구별하여, 자신을 가만히 응시해야한다.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의미는, 우리 각자가 심전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 때, 희망에 탄생한다는 메타포다. 번화한 도시로 가려는 도로에 떨어진 복음은, 영악한 참새와 같은 낚아채고, 땀을 흘리지 않아 쟁기로 깊이 개간하지 못한 땅엔, 저 밑에 수분을 빨아올려야 형성되는 뿌리를 내리지 못해 메말라 죽고, 햇빛을 온전히 받는 것을 방해하는 가시덤불은, 싹의 기운을 망친다.

     

옥토를 애써 마련해야, 신의 은총과 섭리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을 베들레헴, 즉 옥토로 만들어야, 온전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예수의 복음이 각성과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다.

     

사진

<성 프란스시와 성 로렌스와 함께 한 성탄>

미켈란젤로 미리시 카라바조 (1571-1610)

유화, 1609. 268 cm × 197 cm

시실리 팔레르모 수도원에 있다가 마피아가 훔쳐가 장소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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