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4. (水曜日, 크리스마스이브) “내가 죄를 저질렀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이탈하여, 태양이 지구를 포기할까 말게 고민하는시간이다. 동지를 지나 23과 24일은 태양이 이제 멀리 도망가 궤도를 이탈하려는 지구를 안간힘을 다해 잡아당긴다. 만일 지구가 이 길을 이탈하면 우주가 혼돈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재앙을 의미하는 영어던어 disaster는 질서를 지켜야할 별aster가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떨어져 나가버리는dis- 위험한 상태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이 지금 그렇고 세계정세가 그렇다. 인류가 최선아라고 고안해 낸 국가와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얼마나 취약한지 우리는 피부로 경험하고 있다. 투표를 통해 다수결원칙으로 뽑은 대통령大統領(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나는 건방진 단어다)이 자신에게 잠시 위임된 임무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 임무가 국민의 안녕을 위해 애써야화 의무란 사실을 망각한다. 그 조짐이 이태원참사로 우리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무참히 압사당하는, 지구가 탄생한 이후 가장 끔찍한 사건이, 대통령실 옆에서 일어났는데, 대통령이나 국무위원들이 진정한 눈물을 볼수 없었다. 이들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공감장애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국민은 불안하기 시작하였다. 유가족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함께 우는 장엄한 장례를 통해 우리가 운명공동체라는 의례의 필요성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오늘 누가 잡아도 이 불행은 지속될 것 같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설마’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다가왔다.
대통령이 자기 다음대로 권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무식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는 대한민국을 하루아침에 야만국가로 전락시켰다. 국가라는 제도가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신속하게 시인是認하고, 그 대가를 기꺼이 치루려는 용기가, 그 사람을 진정한 리더로 조각한다. 시인은 자신의 상식으로는 알 수 없는 진실을 알아차려 자신에게 흘리는 눈물이다. 그래야, 그 댓가를 정당하게 치루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성서의 아니, 인류의 가장 위대한 리더라고 일컫는 다윗은 극악무도한 범죄자였다. 그러나 예수가 스스소 자신의 조상이라고 자랑할 인물이 되었다. 다윗이 어떻게 진정한 리더로 등극할 수 있었는가? 다윗은 이웃나라 암몬과 전쟁중에 있었다. 다윗을 군사영웅으로 당연히 야전에서 전략을 짜고 선봉자가 되어야하지만, 그가 핑계를 대로 예루살렘에 머문다. 그는 궁궐에서 해가 중천에 뜬 오후에도 침대에서 뒹구는 인간으로 타락하였다. 그런 인간에겐 항상 유혹이 다가온다. 여름 늦은 오후, 지녁 놀이 지중해 바라는 붉은 색으로 물들고 있었을 때 선선히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은 궁궐에서, 저 아래를 귀족들의 테러스를 훌터본다. 한 순간, 한 집의 지붕 위에 첫 눈에 만한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모습을 훔쳐본다. 그 여인은 지붕위에 마련된 욕조에서 목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분명 수많은 첩이 있었지만, 이 무명의 여인은 다윗을 시선과 심장을 훔쳐갔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윗은, 자신이 목동었다가, 운좋게 왕이라는 임무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자신이 왕으로 무슨 일도 저질수 있다고 착각한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을 져버리고 야만적인 동물로 변해, 그 여인을 궁궐로 정을 통한다.
이 여인의 이름을 밧세바다.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는 랍바라는 곳에서 암몬과 참전 중이었다. 전쟁을 길어지고 다윗은 아에 밧세바를 궁궐로 불러 불륜을 계속 저질렀다. 밧세바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자, 천하의 다윗이 불안해졌다. 이 비도덕적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는 무리수를 둔다.밧세바의 아내 우리야를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여, 술을 진탕먹인 후, 집으로 가서 아내 밧세바와 함께 지내라고 종용한다. 다윗은 그래야 자신이 그의 아내를 임신시킨 사실을 은폐할 수 있고 판단하였다. 우직한 우리야는 전쟁 중에 지켜야 군인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군인들과 길에서 잠을 잔다. 이 사실은 안 다윗은 속이 타들어갔다. 그는 그의 상관 요압 장군과 짜고,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으로 인도하여 죽게 만든다. 세월이 흘러 밧세바는 다윗의 아들을 낳고 후궁으로 편하게 살고 있었다.
그때 예언자 나단이 등장한다. 그는 다윗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비유로 말한다. 그 유명한 ‘가난한 사람을 찾아온 부자’이야기다. 부자가 자신을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 자신 소유한 양이 아니라, 가난한 자가 딸처럼 끼우는 어린 양을 죽여, 자신의 친구를 대접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듣고도, 다윗이 자신이 그 못된 부자란 사실을 모른다. 다윗은 아둔함은 그리스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치명적인 결점과 그 결점이 이루어지는 세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비극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비극적인 주인공에 관한 연극이다. 비극적인 리더의 그 치명적인 결점을 고대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명명하였다. 하마르티아는 자신이 가야할 길로부터 이탈하여 헤매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마르티아의 근본적인 의미는 궁술에서 따왔다. 궁수가 활을 당겨 화살을 쏘지만, 그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모두 하마르타이아라고 부른다. 첫째, 궁수가 과녁을 찾지못하는 경우다. 과녁이 너무 멀어, 화살이 도달할 수 없거나 너무 가까워 활을 당길 수 없는 경우다, 혹은 과녁을 찾았지만, 활을 뒤로 충분히 당길 근육이 없는 경우다. 활이 더 이상 뒤로 당길수 없는 부러지기 직전의 상태까지 몰고 가야 화살이 쏜살처럼 과녁으로 돌진할 수 있다, 혹은 궁수가 호흡을 조절하지 못하고 여러 잡념으로 무아상태로 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쏜 화살은 도달하지 못하거나 비껴나갈 수 밖에 없다. 신약성서에서 바울은 하마르티아를 ‘죄’로 설명하였다.
리더가 자신의 정도를 찾지 못해 헤맬데, 그를 따르는 공동체도 위험에 빠진다. 하마르티아는 다음 세 단계를 통해 여실없이 진행된다: (1)오만傲慢; (2) 아둔; (3) 자멸自滅. 오만을 그리스어로 ‘휴브리스hubris’라고 부른다.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특권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이다. 자신이 그 직을 맡았을 때, 가졌던 초심을 잃고 경고 망동하는 행위다. 오만한 자는 말이 많고 자신의 본 모습에 직시할 수 없기 때문에, 술기운에 의존하여 떠들기 일쑤다.
그 오만한 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해 두 번째 단계로 진입한다. 그는 장님으로 스스로 만든다. 자신이 측근을 아부하는 사람으로 선발하여, 스스로 눈과 귀를 가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장님이 되고, 동시에 진실을 들을 수 없는 귀머거리가 된다. 그 앞에 아첨군들은 벙어리가 되고, 리더의 잘못을 애써 외면하는 장님이 된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막무가내의 행위가 타인에게도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아둔을 고대 그리스어로 ‘아테ate’라고 하는데, 그 축자적인 의미는 ‘장님성’이다. 오만과 아둔으로 무장한자는, ‘장님무사’가 되다,
장님무사는 세 번째 단계로 진입하여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자신 남을 헤칠려고 휘두른 칼에 자신의 눈을 찌른다. 그리스어 ‘네메시스nemesis’라는 그 의미다. 이 단어는 흔히 ‘복수’라고 번역되는데, 그 깊은 뜻은 스스로 자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자해自害’다. 그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와 같다. 오이디푸스는 사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과 사소한 일로 다투다 그를 죽인다. 그 사람이 그의 친부란 사실을 비극을 관람하는 모든 사람은 알지만, 자신만 모른다. 그가 정복한 테베라는 도시의 왕비가 미망인이란 사실을 알고 결혼한 사람이 어머니란 사실을 후에 알게 된다. 어머니가 먼저 자신이 아들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도 자살한 어머니의 옷에서 핀을 꺼내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일생 거리를 배회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윗이 치명적인 실수에도 불구하고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존경을 받고 심지어 예수가 다윗왕의 자손이란 칭호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나단이 다윗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즉시 이렇게 말했다:
חָטָ֖אתִי לַֽיהוָ֑ה
하타티 라도나이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습니다.”
위대한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즉시 잘못 시인’하는 용기다. 다윗은 밧세바 사이에 낳은 아들이 죽고, 아들 압살롬이 그를 죽이려는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밧세바 사이에 낳은 또 아들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다윗은 예수의 자랑스런 조상이 되었고, 미켈란젤로의 손을 거쳐 피렌체를 르네상스로 이끈 위대한 조각상이 되었다.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잘못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대통력이 즉시라는 시간을 잃어버렸지만,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여, 더 이상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윗처럼, 자신의 잘못에 대한 정당한 처벌을 받고, 일기일전하여 우리가 좋아했던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는 기백’을 보여주면 좋겠다. 그는 그에게 자신을 잘못을 시인하는 기백이 존재한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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