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8.(金曜日) “동굴여행洞窟旅行”
(2024.11.8.-2024.11.15.)
여행은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오기 위한 훈련이다. 그래서 자신의 뿌리로 돌아오는 귀근歸根을 위한 연습歸根이다. 집은 인간은 누구에게나 그를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회복시켜주는 유일무이한 장소다. 성서에 등장하는 비유,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 느닷없이 둘째 아이들이 먼 지방으로 떠나겠으니, 자신의 몫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한다. 아버지는, 집을 떠나야 집에 소중하다는 인생의 중요한 경험을 얻고자하는 아들에게 선뜻 몫을 준다. 이 몫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메로스’, 히브리어 ‘나흘라’는, 개인에게 준 신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생명을 지는 존재라면, 누구나 마음 속 깊은 곳에 은닉하고 있는 ‘자기됨’이다. 나는 ‘자기됨’을 iamness로 번역해 왔으나, 최근 심취한 13세기 독일 영성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용어를 빌려 isness라고 번역해왔다. isness는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Istigheit의 번역이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집만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축하해주는’, Isness가 회복되기를 간절하게 원하는 시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부터 나와 고생한 ‘머나먼 땅’은 그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시공간이었다. 아무나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누가복음> 15장 13절은 ‘에이스 코란 마크란‘εἰς χώραν μακράν’ 즉 ‘위대한 코라로 깊숙이’로 표현하였다. ‘위대한’이란 뜻은 자신의 과거 목숨을 내놓는 환골탈퇴의 결심과 고통을 동반하다는 뜻이고 ‘코라’란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혼돈’에서 ‘질서’로 이항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시공간, 생명을 배태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서로 극단적인 수정체가 조우하고 생명에 탄생하는 모태이자 어머님의 자궁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압구룬트Abgrund, 즉 탈근거脫根據를 통해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마술이다.
메소포타미아 우주창조신화라고 알려진 <에누마엘리시>에 질서의 신인 마르둑이 반드시 물리쳐야할 혼돈의 여신 티아맛Tiamat의 별칭이 아카드어로 ‘뭄무’mummu다. 뭄무는 만물이 자신의 지닌 모습의 원형틀을 의미하는 단어다, 길가메시가 떠났다는 ‘머나먼 길’을 표현할 때 사용한 아카드어 ‘루크탐’(rūqtam)이 바로 돌아온 탕자가 경험한 ‘코란 마크란’이었다.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집’이다, 영어단어로 표현하자면 건물을 의미하는 하우스house가 아니라 하우스 안에 있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홈home이다. 그런 홈을 지닌 자는, 외부에서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행복하다. 고생이 그런 사람에겐 또 다른 외유를 위한 안식과 회복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1년동안 한국능률협회를 통해 ‘위대한 질문’수업을 진행해왔다. 오늘부터 다음 주 금요일까지 이 수업에서 함께 공부한 도반들과 함께 머나먼 땅 ‘프랑스’로 간다. 우리는 머나먼 땅에서 현생인류가 짐승이 아니라 초인의가능성을 지니고 영적인 인간으로 탄생한 흔적이 있는 두 동굴을 방문한다. 기원전 1만5천년전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가 있는 라스코 동굴, 기원전 3만 5천년전에 그린 동굴벽화가 있는 쇼베 동굴에 갈 것이다. 이 곳에 무엇인 짐승이었던 인간이 영적인 인간, 참다운 인간이 되었는지 고요히 관조하고 싶다.
이 동굴 벽화들을 재현한 박물관을 방문한 후, 남부로 내려가 현대문명과 문화를 창조한 세 명의 아방가르드 정신을 헤아리고 싶다. 20세기 표현주의와 추상주의 시조라고 불리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박물관에서. 그가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탐구했던 색과 형태의 강렬함을 느끼고 샤갈박물관에서는 마크 샤갈Marc Chagall이 인생을 마감하면서 70-80세 집중적으로 그린 <창세기> <출애굽기>에 대해 그린 대형 그림 12점 앞에 가만히 앉아, 그가 인류의 경전인 성서를 어떻게 관조하고 싶다.
그리고 니스에 있는 니체의 철학 길을 도반들과 함께 걷고 싶다, 니체(1844-1900)가 1893-1897년 이곳에서 여름을 지냈다. 그때는 니체는 이제 자신에게 영감을 두 명,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와 작곡자 리하르트 바그너와 완전히 결별한 후였다. 그는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를 가장 위대한 교육자로 치켜세우고, 그의 저작에 등장하는 모든 문장을 암기할 정도였지만, 인간의 삶을 고통으로, 허무로 여기는 그의 시선과 결별한다. 니체에게 고통을 인간을 변모시키는 기반으로, 인간을 신과 합일 시키는 연금술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솔레 공연을 보고 소위 ‘트리스탄 코드’Tristan code의 불협화음을 듣고 대오한다. 불협화음은 그 이전의 음악처럼 화음을 위한 보조가 아니라, 음악전체였다. 트리스탄 코드는 곡 전체에 항존하여, 인생은 비극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바젤대학의 고전문헌학교수였던 니체는, 그의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을 바그너에게 바쳤다. 그러나 니체는 바그너가 그리스도교에 귀의하고 백호주의인 아리아주의를 신봉자라고 판단하여, 그와 결별한 후였다.
그는 이곳 니스에서 새로운 인생의 사상적인 도반을 발견하였다. 한명은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에프스키였고 다른 하나는 산책이었다. 그는 니스에게 기차로 20분 걸리는 중세 무어인들의 만든 성 에즈로 와서 2km를 걷고 제법 가파른 400m정도의 언덕 산책길을 걸었다. 신체가 허약하고 특히 천식으로 고생했던 니체는 이곳에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였다. 그는 <선과 악의 저편에> (1886)와 <차라수트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 원고를 다시 차분히 읽고 완성하였다.
이 프랑스 기행이 우리 모두, 자신만의 깊은 동굴로 내려가, 되어야할 자신, Isness의 잠깐이라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Ich muß, gleich dir, untergehen, wie die Menschen es nennen, zu denen ich hinab will. So segne mich denn, du ruhiges Auge, das ohne Neid auch ein allzugroßes Gluck sehen kann! Segne den Becher, welcher uberfließen will, daß das Wasser golden aus ihm fließe und uberallhin den Abglanz deiner Wonne trage! Siehe! Dieser Becher will wieder leer werden, und Zarathustra will wieder Mensch werden. Also begann Zarathustras Untergang.
“당신처럼, 저도 내려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한 대로, 나는 그들에게 내려갈 것입니다. 저를 축복해주십시오. 당신의 고요한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위대한 행복을 부러워하지 않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넘치려는 잔을 축복하십시오. 물이 잔으로부터 황금빛으로 넘쳐 당신의 희열을 담은 반영을 사방으로 나릅니다. 아, 보십시오. 당신의 잔이 비게 될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진
<쇼베동굴 손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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