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4.(木曜日) “장작더미”
어제 오후에는 건축가 김개천교수, 보노몽 박인호대표와 만났다. 우리는 견주와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반려견들이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을 이 땅에 구현해보자고 힘을 모았다. 이 공간이 구체화되고 완성되기까지 많은 시간과 힘이 필요하지만, 그 중요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벨라가 우리에게 준 아이디어이자 선물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반려견들과 그 견주들이 와서, 서로에게 한없이 주는 사랑, 신뢰, 몰입의 확인하고 수련하는 공간이면 좋겠다. 부모나 아이들이 반려견, 산, 시냇물, 연못, 나무, 꽃, 별을 바라보고, 시를 읽고, 대화하여 자신을 치유하면 좋겠다. 4만년전 늑대개가 호모 사피엔스를 선택하여, 늑대lupus canis의 일부가 개lupus familiaris가 되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선택받는 자들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가 되었다.
진화하지 못한 사만년전 호모 사피엔스의 진상이 유발 하라리가 <호모 사피엔스>에서 말하는 온갖 잡다는 정보로 장착한 호모 사피엔스이며, 친절이나 겸허, 조화와 헌신으로 진화가 아니라, 경쟁과 이성, 약육강식과 기계로 장착한, 하라리의 용어를 빌리자면 호모 데우스, 즉 스스로 신이라고 우기는 인간이다. 그런 진상의 전시장이 IT기술로 우리의 삶을 장악하려는 현대이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트럼프와 해리스의 미국 대선, 그리고 대한민국의 수치스런 자살률과 출산률, 전례가 없는 우울증 환자의 증가가 그 엄연한 증후들이다.
반려견들은 뒷 마당으로 이어진 가파른 야산으로 올라가면, 분주해진다. 밤새 그곳에 머물렀던 야생동물 때문이다. 능선으로 올라 한참 고라니길을 따라가면, 길을 잃은 방랑자가 된다. 순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판단되면, 가던 길을 돌려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가던 길을 더욱 가, 완전히 길을 잃고 싶은 도사린 심정이 일어난다. 그 때 그전에 들리지 않던 새소리가 들린다. 우리를 인도하는 나이팅게일이다.
이 심정을 시인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은 젊은 로버트 프로스트가 <장작더미>라는 시에서 표현했다. 1914년에 발간한 North of Boston (1914)에 실린 시다.
The Wood-Pile
BY ROBERT FROST
from North of Boston (1914)
장작더미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1874-1963)
시집 <보스톤 북부>(1914)
Out walking in the frozen swamp one gray day,
I paused and said, 'I will turn back from here.
No, I will go on farther—and we shall see.'
The hard snow held me, save where now and then
One foot went through. The view was all in lines
어느 흐린 날, 얼어붙은 늪지를 산책하러 나갔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여기서 돌아가자.
아니야, 좀 더 멀리가. 그러면 우리가 볼 거야(그리고 그때 뭐할지 결정하자).”
얼어붙은 눈이 나를 붙잡았다.
지금도 그리고 그때도 한 발을 내 디뎠을 뿐이다.
광경은 이랬다.
Straight up and down of tall slim trees
Too much alike to mark or name a place by
So as to say for certain I was here
Or somewhere else: I was just far from home.
A small bird flew before me. He was careful
위로 아래로 커다랗고 가느다란 나무들이 곧게 줄지어 서 있었다.
나무들은 너무 똑같아 내가 여기나
다른 곳에 있었더라고 그 장소를 표시하거나
이름을 지을 수 없었다: 나는 단지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한 조그만 새가 내 앞에 날아왔다. 그 새는 조심스러웠다.
To put a tree between us when he lighted,
And say no word to tell me who he was
Who was so foolish as to think what he thought.
He thought that I was after him for a feather—
The white one in his tail; like one who takes
그 새는 자신이 내려앉을 때, 우리 사이에 나무를 둘만큼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한 마디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생각할 정도로 너무 어리석었다.
그는 내가 그의 꼬리에서 깃털-
하얀 깃털을 (뽑기) 위해 뒤 따라왔다고 생각했다.
Everything said as personal to himself.
One flight out sideways would have undeceived him.
And then there was a pile of wood for which
I forgot him and let his little fear
Carry him off the way I might have gone,
사람들의 모든 말을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개인적으로 받아들으는 사람과 같았다.
한번 옆으로 날아가면, 그가 속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텐데.
그런 후, 그 새를 잊게 만든 장작더미가 있었다.
새가 약간 겁을 먹고 내가 갔을 법한 길로부터 이탈했다.
Without so much as wishing him good-night.
He went behind it to make his last stand.
It was a cord of maple, cut and split
And piled—and measured, four by four by eight.
And not another like it could I see.
나는 그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는 장작더미 뒤를 마지막 저항선으로 삼았다.
그것은 잘리고 쪼개진 단풍나무 막대 줄로
쌓아놓았다. 치수는 4 x 4 x 8 피트였다.
그와 같은 다른 막대는 볼 수 없었다.
No runner tracks in this year's snow looped near it.
And it was older sure than this year's cutting,
Or even last year's or the year's before.
The wood was gray and the bark warping off it
And the pile somewhat sunken. Clematis
올해의 눈에는, 어떤 지나간 자국들로 근처에 둥그렇게 나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올해 자른 것보다 분명히 오래되었다.
혹은 심지어 작년 혹은 재작년 것보다도 오래되었다.
장작은 회색이었고 껍질은 벗겨져 나왔고
장작더미는 다소 가라앉았다. 클레마티스는
Had wound strings round and round it like a bundle.
What held it though on one side was a tree
Still growing, and on one a stake and prop,
These latter about to fall. I thought that only
Someone who lived in turning to fresh tasks
꾸러미처럼 장작을 칭칭감았다.
더미를 지탱하는 것은, 한쪽에 아직도 자라고 있는
나무였고, 다른 한쪽에 있는 말뚝과 버팀목이었다.
그것은 넘어지지 직전이었다.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며 사는 사람만이
Could so forget his handiwork on which
He spent himself, the labor of his ax,
And leave it there far from a useful fireplace
To warm the frozen swamp as best it could
With the slow smokeless burning of decay.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한 자신의 손작업,
도끼의 수고를 잊을 수 있다.
그리고 쓸모있는 벽난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얼어붙은 늪지를
천천히 연기 없이 태우는 부식으로 녹이고 있었다.
사진
<산책길 쓰러진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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