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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月曜日) “Gospel according to Myself”

2024.10.21. (月曜日) “Gospel according to Myself”

에세이 숙제 1:

“여러분은 어떤 복음을 자신에게 전달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일생을 통해 기록하시려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종교란 자신이 언제는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의 창작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을 가지고 4만년전 빙하기 시절, 동굴로 내려가 묵상하기 시작하였습다. 이 물음은 우리가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높은 산이나 끝이 없는 바다, 혹은 우리 삶과 연관을 맺은 동물이나 식물과 마주할 때, 갑자기 우리의 감성에서 떠오르는 희열과 깨달음입니다.

     

보통 인간은 남들이 말하는, 소위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쾌락을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립니다, 그러다 자신이 점점 피폐해지는 것을 확인하고 자조에 빠집니다.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인생의 마지막에 발견한 것처럼, 과학과 종교를 넘어선 그 무엇과 마주칩니다. 종교라고 부르는 것들을 초월한 종교성, 아름다움이라고 구축한 예술을 넘어선 벅찬 카타르시스와 우연히 만나죠. 깨어있는 자들은, 이 섬광을 놓지지 않고, 자기 삶의 등불이 되도록 이제 시선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돌립니다. 회심回心입니다. 바울이 그랬고 어거스틴이 그랬습니다. 성 프란시스가 그랬고 마르틴 루터가 그랬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은 비록 무신론자이지만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지칭합니다. “저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과학과 종교의 구분과 갈등을 반대하면서 자신은 ‘심오하게 종교적인’ 사람으로 칭합니다. 이 종교성이 영성이고, 이 카타르시스가 신비입니다.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 경험이기에 뭐라고 단정을 지어 단어로 말할 수는 없지만,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이 말한 ‘지성이 아니란 직관’이라고 명명한 인간 고유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이 종교, 저 종교, 이 사상, 저 사상, 종교와 철학 쇼핑을 하다 정착하지 못하는 지적인 유목민이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장소를 가면 행복을 느낄 것 같아 이 나라, 저 나라, 심지어 화성까지 가기만, 돌아와 허무를 발견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좋은 집과 정원을 마련하지만, 그 안에서 권태와 불편을 추수합니다. 우리는 우여곡절을 경험한 후에, 그 진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마침내 평안과 만족을 발굴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가장 깊은 곳에 영원한 샘물을 뿜는 내적인 정원을 마련합니다.

     

2000년전 팔레스타인의 노동자 아들로 태어난 예수가 이 선명한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는 마라톤전쟁에서 아테나가 승리했다는 소식을 알린 페이리피네스처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메타노이에테 에게켄 데 헤 바실레에아 우라논’ 이 그리스어 문장을 예수가 말한 아람어로 다시 번역한다면, ‘타브, 아타 말커타 샤마야’입니다. 이 아람어 문장을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섭리가 이미 우리곁에 이미 와 있습니다.”

     

첫 에세이 주제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복음을 자신에게 전달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일생을 통해 기록하시려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thechora@naver.com으로 금요일까지 제출해주시면, 코멘트를 달아 카톡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번 토요일 수업은 ‘메시아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마태복음> 1장을 공부합니다. 정독하기 시작하시고, 마음속에 올라는 질문을 가지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해 보십시어. 교재는 목요일 저녁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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