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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1. (金曜日) “괜찮아”

2024.10.11. (金曜日) “괜찮아”

     

어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어둠이 깊다면 새벽이 왔다는 복음이라는데, 칠흑같이 희망에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에 한 줄기 빛이 보였다. 그래도, 신이 우리를 버리지는 않았구나! 한강이 글은 슬그머니 찾아오는 여명이다. 읽고 있으면 언제 그랬는지, 나를 보게 되고 주변을 살피게 된다. 그녀가 주는 고요가 좋다. <채식주의자>는 누가 선물해 책장에 고이 잠들고 있다. 나도 남이 좋다고하니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글을 쓰는 속물이다. 다음 주 토요일(2024.10.19.)에 새로 시작하는 <복음서는 무엇인가>라는 줌수업에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나오는 시들을 함께 읽기로 결정했다.

     

노벨은 자신이 다이너마이트를 발견하여 많은 부도 축적했지만,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에 괴로웠을 것이다. 마치 핵폭탄의 이론을 제공한 아이슈타인과 제조를 진두지휘한 오펜하이머의 회한과 유사했을 것이다. 이런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은 올림픽 수상과 함께, 인간의 지성과 영성을 발견시킨 교두보다. 인간은 묘하게도,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는 본능으로, 스스로를 발전시킨다. 올림픽선수들은 4년을 메달을 따기 위해서 정진한다. 그러나 노벨상은 다르다. 수상자들은 자신의 일상, 즉 연구실에서, 실험실에서, 봉사를 실천하는 오지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자신을 위해 갈고 닦으며 남몰래 흐르는 눈물들이다.

     

어제 많은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을 것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노벨상을 수상하는 과정이 비밀이지만, ‘공정한 경쟁’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불공평하고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이 질식하지만, 그 나마, 노벨상 수장자들은, 소수의 양심이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심사자들의 판단으로, 공정하게 심사헸기 때문이다. 한강이 수상 전화가 걸려왔을 때, 아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단다. 진실의 순간은 언제나 갑작스럽기에 눈물이 난다. 그 두 번째 이유는, 그런 글을 쓰기 위해, 한강과 같은 많은 물을 눈물로 흘렸을 것이다. 자신이 흘린 눈물 만큼,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런 거룩한 일상이 이어져,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녀가 정갈하게 마련한 글의 씨앗을 뿌리길 바란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처럼, 금방 사라지는 TV 프로그램에 ‘제발’ 나오지 않으면 좋겠다. 영원히, 그녀의 씨알을 심장 안에 품어, 마음에 싹을 틔우고, 시절에 어울리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가을엔 낙엽에 되어 죽은 줄만 알았지만, 겨울 눈 속에서 생명력을 키워, 봄에 다시 싹을 내미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생명이 되면 좋겠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신체운동과 글쓰기다. 신체 운동은 자신의 몸 안에 기생하는 정신을 높이고 영혼을 일깨우는 발판이다. 인간은 이 발판을 통해, 말하기 전에 침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보기 전에 눈을 감아야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움직이기 전에, 멈춰야한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무엇보다도 생각하기 전에, 생각을 작동하게 하는 생각을 휘어잡고 절제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다.

     

글쓰기는 인생의 파란만장 경험이 작가의 오장육부로 내려와 숙성되고 썩으면, 그녀의 몸을 통해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누에고치 실이다. 거의 보이지 않아 가물가물해 현묘玄妙하다. 현모한 글이라, 비슷한 고통을 당한 인간들을 이해는 자비慈悲의 글을 선사한다. 노벨문학상을 정치적인 이유로 거부한 장 폴 사르트르도 있지만, 한강의 글은, 나도 모르는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그녀의 글은, 암울한 대한민국에서, 남 흉내만 내가 지쳐, 생을 마감하고 싶은 영혼들에게, 한 줄기 빛이자 한 모금 샘물이다. 우리에게 괜찮다고 말한다.

     

오늘처럼 기쁜 날이 있을까! 우리 우울한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자신이 처한 삶이, 어떠하든, 괜찮다는 복음을 그녀가 자신이 마련한 홰에 올라 조그만 소리로 외친다. 더 많은 한강들이 등장하여, 대한민국을 활기가 넘치는 생명의 나라로 바꾸면 좋겠다.

     

괜찮아​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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