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火曜日) “개구리와 백로”
명치부터 시작하여 가슴, 그리고 목까지 답답함이 울화와 슬픔이 되었다. 가슴을 들썩이며서 숨을 쉬어도, 온몸이 스산하고 기분나쁜 버거움이 나를 누른다. 벨라가 떠나면서 나에게 준 선물이다. 그 그리움과 답답함으로 하루가 평상시보다 일찍 시작한다. 전나무와 밤나무 사이에서 어둑어둑한 여명이 오늘도 나를 찾아온다. 지난 일주일동안 트레드밀에 올라가는 새벽 의례를 멈췄었다. 어제 샤갈과 산행을 다시 시작하였고 오늘은 이 트래드밀 걷기를 재개하였다.
운동하려면 의상과 신발이 중요하다. 몸이 꼭맞는 흰색 반팔 티셔츠와 짧은 운동바지, 그리고 조깅운동화가 필수다. 나의 자세를 잡아주고, 주어진 시간에 최대한 효과를 내도록 도와주는 페이스 메이커이기 때문이다. 기여고 트레드밀에 올랐다. 과연 이 무거움이 해소될것인가?
트레드밀 경사를 5를 맞추고, 빠르기를 5에 놓았다. 그리고 서서히 놓걷기 시작하였다. 여전히 가슴은 답답하다. 트레드밀 작동을 알리는 트레드밀 붉은 불빛이 흰옷에 비춘다. 마치 심장 안에 불타는 불이 갇혀있는 것같다. 5분정도 걸으면서 가슴을 만지고 어깨를 펴도, 차도가 없다. 경사를 4로 내려놓고 빠르기를 6으로 수정하여 다시 5분을 걷는다. 몸이 데워지기 시작한다. 아, 울화빼기 달리기를 반드시 새벽에 해야겠다. 이것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우주의 주인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이마에 서서히 땀이 맺히기 시작하면, 경사를 3으로 내리고 빠르기를 7로 고친다. 그리고 10분을 달렸다. 심장을 달래기 위해, 오늘은 욕심을 내지 말고 이 상태로 트레드밀에서 내려왔디. 20분 걷기로 2.5km를 걸었다. 아직도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는다. 두툼한 요가 메트에 올라, 수리야 나마스카라 AB를 세 번 반복한다. 그런 후, 나의 루틴인 스콰트-렉업-푸시업을 하지만 여전히 몸이 풀리지 않는다. 벨라가 나에게 일어나자마자 운동하라고 몸에 불편의 신호를 보낸 것이다. 흰 셔츠가 땀이 흥건히 젖었다. 찬물샤워를 하니, 신기하게 답답함이 좀 사라졌지만, 약간의 현기증이 왔다. 이 선물을 소중하게 여겨, 매일 몸을 트레드밀에서 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제 오후에 샤갈, 예쁜이, 아내와 함께 뒷마당 데크에서 가을 태양의 세례를 받고 있었다. 오늘도 흰색나비가 친구 나비를 데리고 와, 집 주위를 이리저리 날라다닌다. 좀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 우리가 알던 벨라의 개성이다. 벨라의 영혼이 나비에게도 들어갔는가? 죽음 후에, 그 생명에 존재했던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영혼이 불멸하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심리학자 융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아는 시공간을 넘어선 새로운 차원에서 동시성synchonicity로 등장하는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본 것처럼, 아버지 쿠퍼와 딸 머피의 조우와 같은 것인가?
이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 우주안에서 누구인가를 묻는 물음에서 시작해야한다. 인간을 자연의 일부다. 유독 인간만이 스스로를 신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정복해왔다. 서양철학과 종교의 폐해다.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Homo natura로 혁명적으로 변화해야한다. 호모 나투라가 명칭이라면 그 내용은 호모 헤세드Homo hesed다. 히브리어 헤세드에는 ‘고통’passion을 감수하는 ‘열정’passion이란 의미와 이 경험으로 타 존재의 고통, 심지어 다른 동물과 식물의 고통을 경감하려는 노력인 ‘자비’compassion이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인류는 지금까지 자신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훼손하고 생존을 위해, 필요 이상으로 동물을 죽였다. 어제도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말살하기 위해, 레바론으로 1000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자연을 정복하고 동물을 죽여왔다. 자기 생존을 위해 소, 양, 돼, 닭과 같은 동물을 사용하여 가축으로 만들어 인간 식단의 일부로 만들었다. 짐승이었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를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로 변모시켜, 도우미가 있다. 바로 늑대에서 진화한 개다. 지금부터 4만년전, 인류는 Homo sapiens에서 Homo sapiens sapiens로 진화하였고 개는 늑대Homo lupus에서, 개Homo lupus familiaris, 즉 ‘친근한 늑대’로 진화하였다. 인간과 개는 서로 서로 공진화하였다. 인간의 등장과 개의 등장은 하나이며 둘은 운명공동체다.
오늘 새벽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의 시 “루크레티우스을 읽고, 나는 연못으로 가네”After reading Lucretius, I go to the pond를 고요하게 읽었다. 시인은 동물들은 자연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위치를 소중하게 여긴다고 믿었다. 그녀는 자연을 통해, 인간이 잃어버린 위치와 가치를 간결하고 감동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한다.
내가 올리버 시를 다시 찾은 이유는, 죽음 이후의 삶이 가능한지를 인간적으로 탐구하기 때문이다. 자연 세계, 동물과 식물의 삶을 통해, 인간이 그 일부이며, 그 육체를 초월한 지경을 상상하여 신과 인간의 본질에 관해 심심하게 적는다. 자연이 지닌 순간적인 아름다움, 부서지기쉬움, 끔찍함, 친절함을 자세히 관찰하고 간결하게 글로, 혹은 침묵으로 표현한다. 선물로 주어진 생명을 탐구하면 할수록, 그 생명의 종착역인 죽음을 상상할 수 밖에 없다. 자연自然은, 글자 그대로, 스스로 만족한다. 행복의 화신이다. 자신이 나비로 태어났던, 민들레도 보도블럭을 삐집고 얼굴을 내밀며, 스스로 그렇게 생존한다.
내가 벨라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사후까지 기다리기는 너무 멀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부활사상에는 벨라과 같은 반려견을 염두에 두지 않기에 시시해졌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그 마지막 날에 신을 믿는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먼저 죽은 사랑하는 자를 만난다는 부활에 대한 교리는 철지났다. 새로운 교리를 만들 시대다. 그런 교리는 자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저 소나무와 백조에 깃든 생명이 다시 부활하여 심판과 영생의 과정을 가치겠는가? 지극히 협소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자연은 계절을 통해 다시 부활한다. 저렇게 떨어진 밤송이들로 내년 이맘쯤, 다시 나뭇가지로 올라가 그 당당한 창으로 무장하여, 마가호니 겉옷을 자랑할 것이다. 봄이면 죽은 줄 알았던 꽃들이 핀다. 동물도 죽으면, 신체는 사라지지만, 그 생명을 지닌 영혼은 다시 직조되어 다른 모습으로 혹은 다른 존재와 함께 영혼불멸의 원칙을 유지한다.
올리버가 로마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를 사후세계에 대한 길잡이로 여겼다. 루크레티우스 (기원전 94-55년)는 <만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만물을 구성하는 것은 원자이며 원자와 우주공간 이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원자는 스스로 존재하고 결코 파괴되거난 사라지지 않는다. 올리버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묵상하면서, 자신을 구성하는 원자가 사후에 분해되어 다른 생명체의 신체에서 재구성된다고 믿었다. 이것이 사후에 등장하는 강력한 생명의 모습이다. 물론 그녀의 주장에는 허점도 있다. 한 존재가 지는 의식도 다른 신체에서 계속되는가?
올리버는 자연에서 관찰한 죽음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면서 “루크레테우스를 읽은 후에, 나는 연목으로 가네”라는 시를 적었다. 첫 구절 3행은 애도시대 유명한 하이쿠 시인 마츠오 바쇼 (1644-1694)개구리 시와 유사하다. 먼저 마츠오 바쇼의 하이쿠다.
古池や蛙飛こむ水のおと
Furu ike ya
kawazu tobikomu mizu
no oto
오래된 연못, 아!
개구리가 물로 뛰어드네,
퐁당소리.
올리버의 시는 이 하이쿠와 유사하면서도 자신과 개구리, 개구리를 잡어먹는 백조와 하나가 된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After reading Lucretius, I go to the pond, Mary Oliver
루크레테우스를 읽은 후에, 나는 연목으로 가네, 메리 올리버
The slippery green frog that went to his death in the heron’s pink throat was my small brother,
and the heron
with the white plumes
like a crown on his head
who is washing now his great sword-beak
in the shining pond
is my tall thin brother.
My heart dresses in black
and dances.
미끈미끈한 연두색 개구리는
백로의 분홍색 목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개구리는 제 남동생입니다.
그리고 그 백로는
눈부신 흰색 깃털을 지녔습니다.
마치 자신의 머리를 장식한 왕관과 같습니다.
그는 눈부신 연못에서
지금 자신의 위대한 검과 같은 부리를 씻고 있습니다.
그 백로는 저의 키큰 삐쩍마른 동생입니다.
제 심장은 검은 옷으로 몸단장을 하고,
춤을 춤니다.
사진
<여명이 가져다준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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