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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4.(木曜日) “수련자의 세 가지수련” (<요가수트라> II.1)

2024.1.4.(木曜日) “수련자의 세 가지수련” (<요가수트라> II.1)

     

어제 ’한국아쉬탕가요가협회‘에서 나는 <요가수트라> 훈련품 경구 1을 강의했다. 요가는 특별한 몸동작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변화하여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충만하고 영적으로 깨어나게 하는 체계적인 수련방법이다. 요가는 다른 훌륭한 수련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개선할 수 있는 구별된 습관을 훈련시켜주는 운동이다. 눈이 덮인 야산으로 진입하면, 자연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요가는 과거에 안주하려는 나의 욕심에 고삐를 채원, 한 걸음 한 걸음 정진하게 돕는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가, 자신의 마음 속에 켜켜히 쌓인 번뇌를 걷어낸 후, 다음 세가지를 수련하라고 말한다. <요가수트라: 훈련품> 경구 1에서, 요가훈련의 근간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말한다:

     

तपः स्वाध्यायेश्वरप्रणिधानानि क्रियायोगः

tapaḥ svādhyāy-eśvarapraṇidhānāni kriyā-yogaḥ

     

(직역)

“요가수련자는 다음 세 가지 연습을 통해 삼매경으로 진입할 수 있다.

첫째, 자신에게 엄격한 삶. 둘째, 자기공부, 셋째 자신의 정한 신에 대한 헌신이다”

(의역)

“요가수련자는 다음 세가지를 동반한 요가를 통해 삼매경으로 진입할 수 있다.

첫째, 자신이 정한 원칙을 반드시 지키려는, 자신에게 엄격한 삶.

둘째,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깊이 보고 수정하려는 탐구하는 삶.

셋째, 수련을 통해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 즉 그 신에만 복종하려흔 헌신적인 삶.”

     

(어휘)

īśvara ‘신’ (I.23 참고)

īśvarapraṇidhāna ‘자신이 정한 신에게 헌신;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부과한 임무

kriyā ‘행위; 행위를 동반한 요가’ (<kr- ‘하다’)

praṇidhāna ‘헌신’ (I.23 참고)

svādhyāya ‘자습’ (<sva ‘스스로’ + adhi + ā + I ‘가다’; 자발적으로 어떤 곳으로 들어가다)

tapaḥ ‘엄격; 자기훈련’ (<tap ‘뜨겁다’)

yoga ‘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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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인들은 욕심이라는 습관대로 행동하려는 자신을 바로 잡아, ‘또 다른 자아’, ‘더 나은 자아’를 만들기 위한 전인적인 훈련을 ‘요가’라고 불렀다. ‘요가’는 소나 말에 씌우는 멍에처럼, 과거의 습관대로 자동적으로 즉흥적으로 행동하려는 사람의 생각과 몸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이다.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다.

     

요가 훈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요가수련자 자신 안에 존재하는 희미한 불씨에 불을 붙어 활활 타오르게 만드는 ‘연습演習’이며, 다른 하나는 그 안에 존재하는 수련을 방해하는 요소들에 대한 체계적인 ‘절제節制’다. 인도인들은 ‘연습’을 산스크리트어로 ‘아브야사’abhyāsa라고 부르고 ‘절제’를 ‘바이라그야’vairagya라고 명명하였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제2권 ‘사다나’sadhana라는 제목의 책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사다나’란 요가수련자의 궁극적인 목적인 삼매경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습득해야하는 삶의 태도다.

     

“요가수련자는 다음 세 가지 연습을 통해 삼매경으로 진입할 수 있다.

첫째, 자신에게 엄격한 삶. 둘째, 자신을 깊이 응시하는 공부. 셋째 자신의 정한 신에 대한 헌신이다.”

     

위 문장에 등장하는 ‘크리야-요가’는 구루가 특별한 의례를 통해 선별된 제자에게 전승하는 의례 행위를 동반한 요가다. 요가수련자는 다음 세 가지 연습을 통해 삼매경에 진입할 수 있다.

     

첫째, 자신에게 엄격한 삶이다. 요가 수련의 첫 관문은 다음 질문에서 시작한다. “당신은 자신에게 엄격嚴格한가?” “혹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스승이 되어 훈련하고 있는가?” 파탄잘리는 요가 행위의 첫 번째 관문을 산스크리트어로 ‘타파스’tapas라고 말한다. ‘타파스’는 ‘탑’tap이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그 기본 의미가 “불태우다; 빛나다”이다. 타파스는 자신이 극복해야할 과거의 자신을 불태우고 매일 매일 수련을 통해 인내하는 과정이다. 타파스는 또한 새가 알에서 깨나기 위해 어미가 알을 품어 따뜻하게 만들고 때로는 알을 이리저리 굴려 조화롭게 만드는 과정이다. 타파스 수련을 위해서는 자신을 훈련시킬 어머니와 같은 스승이 필요하다. 자신이 안주하고 있는 ‘알’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그는 영원히 도태하여 죽고 만다. 타파스는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환경을 박차고 나오는 용기이기도 하다.

     

나는 타파스를 ‘엄격’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이란 순간에 몰입하여 더 나은 자기 자신을 만들기 위해 하루하루를 거룩한 일과日課로 만들어야한다. 자신이 고안하여 만든 거룩한 일과에 자신을 맞추는 행위가 ‘엄격’이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관객이나 비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열망하는, 자신에게 감동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매일 매일 수 시간을 할애하여 연습에 몰입한다. 한 피아니스트는 말했다. “삼일을 연습하지 않으면, 관객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며 비평가가 알고,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며 자신이 안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사람은 남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유일한 경쟁자는 자신일 뿐이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 머리맡에 놓은 자명종 시계가 오전 다섯 시면 울린다. 밖은 아직 캄캄하고 침대는 나를 붙잡는다. 매일 매일 하루만 예외로 두고 좀 더 자면 어떨까하고 내 자신을 유혹한다. “타파스”는 나를 깨운다. 약속은 자신과 하는 것이며 수련은 자신과의 약속에 대한 실천이다. 자신에게 엄격한 하루가 영겁永劫이며 영겁은 잠자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일어나는 순간瞬間이다.

     

둘째, 자신만을 지금 깊이 응시하는 공부인 ‘스바드야야’svadhyaya다. 요가의 두 번째 관문은 다음 질문이다. “당신은 자신을 깊이 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심오한 자신을 오랫동안 응시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눈으로 바깥세상을 보고 판단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나 다른 사람을 보는 이유는, 그 대상 안에 존재하는 경이로움과 신비함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그 대상을 온전하게 그 대상의 입장에서 보는 엑스타시의 행위는 ‘관찰’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자신에게 엄격한 기준을 가지지 못하면, 관찰을 통해 나쁜 습관을 얻는다. 나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람은 자신이 하루를 기준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그것이다.” 자신이 핸드폰 안에 게임에 하루 종일을 소일한다면, 그는 ‘게임’이다. 혹은 연예인들의 신변잡기를 늘어놓은 TV프로그램에 넋이 빠져 본다면, 그는 ‘바보상자’다. 공부의 대상은 자신 일 수밖에 없다. 미국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말한다. 일정한 교육을 받고 자신을 돌아다보는 시점이 오면 “누구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무식無識이며 누구를 흉내 낸다는 것은 자살自殺이다.”

     

파탄잘리는 두 번째 요가 행위로 ‘심오한 자기 응시’를 말한다. 이것을 산스크리트어로 옮기자면 ‘스바다야야’svadhyaya’다. ‘스바드야야’는 ‘자기 자신’을 의미는 ‘스바’와 ‘공부; 묵상’을 의미하는 ‘드야야’의 합성어다. 그러므로 ‘스바드야야’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응시; 자기 영혼에 대한 묵상’이다. 자신을 공부하고, 자신에 대해 묵상하기 때문에 사려가 깊고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한다. ‘스바드야야’에는 우리가 깊이 응시할 대상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내 자신”이다. 공부는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내 안으로 습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 안에 있지만 나도 알지 못하는 위대함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과정이다. 현자는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다. 그 지식이 기초가 되어, 세상도 타인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자기 안에 단단한 껍질에 둘러쌓여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자신’을 들춰내는 행위가 묵상이다. 우리가 그런 자신을 응시하길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여 그런 자신을 자신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존재를 신神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13세기 자신을 찾기 위해 중동에 위치한 험한 시내 산에서 40년간 지낸 모세가 마침내 신을 만나 이름을 묻는다.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신은 대답한다. “나는 내 자신이다.” 요가행위는 자신의 심연에 존재하는 더 위대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발견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요가 수련을 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이해한다.

     

‘심오한 자기 응시’는 지금과 여기에 대한 강력한 깨달음이다. 자신을 깊이 응시하는 행위는 바로 이 순간 내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들을 선명하게 보고, 그 생각을 발생시키는 또 다른 나를 보는 연습이다. 또한 내 숨이 몸 안에서 출발하여 목과 코를 통해 우주로 빠져나가는 순간을 포착하고, 눈꺼풀이 깜빡이는 과정을 느린 속도로 인식하는 연습이다. ‘스바드야야’는 내가 열망하는 나를 위한 수련은 바로 여기, 이 순간에서만 가능하다는 간절한 마음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 순간에 나는 내가 할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가릴 수 있는 정신을 가다듬는다. 자신을 깊이 응시하는 않는 하루는 나에게 무의미하다.

     

세 번째, 자신이 정한 자신의 정한 신에 대한 헌신이다. 요가 수련의 세 번째 관문은 다음 질문이다. “당신은 스스로 정한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까? 그것이 존재한다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내가 인생에 있어서 어떤 일에 몰입하여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내가 정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 과정이 목적지고, 목적지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이스바라-프라니다나’isvara-pranidana는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되어있다. 첫 요소인 ‘이스바라’는 ‘최선의 주인; 복의 주인’이란 의미다. 이 단어는 후에 종교와 철학적인 개념어로 사용되어 ‘신’, ‘진정한 자아’ 혹은 ‘불변의 현실’로도 번역된다. 이스바라는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나를 자극하고 가르치는 안내자‘다.

     

인생에 있어서 삶의 의미를 담은 목적은 마라톤의 결승선이나 궁수의 과녁과 같다. 마라톤을 달리고 있는 선수가 결승점을 모른다면, 그의 삶은 허망하다. 만일 누가 그에게 ‘왜 당신은 마라톤 경주를 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달리니까 덩달아 달린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혹은 부모나 친구가 마라톤 경주에 참가하는 것이 삶에 유익하다는 말을 듣고 달리고 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 것이다. 지속적인 달리기는 인간과 같은 온혈포유류에게는 치명적이다. 체내온도가 2-3도만 상승에도, 신체기능이 마비되고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면 간호사는 제일 먼저 환자의 온도를 잰다. 고열은 치명적인 병의 가장 가시적인 표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마라톤과 같은 극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그 목표점이 분명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선수들이 마의 20km와 30km 구간을 달릴 때, 그(녀)의 고통을 경감하는 도파민이 뇌에서 분비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순간에 고통대신에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현상을 경험하며, 그 구간을 넘어서서 결승점으로 내달릴 수 있다. ‘러너스 하이’은 인생에 있어서 자신만의 목적지를 가진 자들이 삶에 적용하는 신명神明이다. 신명은 그에게 신적인 에너지를 공급하여, 목적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달리게 하는 원동력이다.

     

과녁을 찾지 못하는 궁수처럼, 허망한 사람은 없다. 최고의 스승 밑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궁수가 올림픽 경기에 참석하여 활을 왼손으로 안정적으로 들어 올리고 오른 손으로 시위를 어깨 뒤로 힘껏 댕기고, 숨을 골라 삼매경의 순간에 진입했으나, 과녁을 몰수 없다면, 이보다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다. 과녁을 찾을 수 없다면, 그는 지난 4년간의 훈련은 물거품이 된다. 과녁은 나의 정성과 집중을 요구하며, 명중을 위한 과정을 고통에서 환희로 전환시키는 마법이다. 목적지는 확인할 수 없는 미래에 도착할 신기루가 아니라, 수련자가 지금-여기에서 그 목적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는 정성이다. 지금의 정성이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반복되고 이어지면, 자신도 모른 책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프라나다나’는 ‘몰입; 집중; 헌신’이란 의미다. ‘이스바라-프라다나’는 ‘나의 정성을 바쳐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몰입하는 행위’다. ‘자신이 정한 목표’이기 때문에 결과에 상관없이 집중할 수 있다. 수련하는 사람에겐 이 순간의 나의 행위가 목적지고, 목적지는 이 순간 행위에서 완성된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에서 크리슈나 신이 수련 중에 있는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아르주나여! 너는 너의 노력의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항상 행동해야한다.” 자신이 정한 목표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이 목적지다. 요가수련자는 매일 아침 스스로에게 다음을 물어야한다. “나는 나에게 엄격한가?” “나는 내 자신을 심오하게 응시하고 관찰하는가?” “나는 내가 목적지와 이어지는 여기-지금에 몰입하고 있는가?”

     

사진

     

<눈 덮인 가평 야산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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