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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7. (土曜日) “용서”

2024.1.27. (土曜日) “용서”

     

가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1932-1996)의 삶은 나도 알지 못했던 나의 심금을 울려, 나에게 도덕적이며 실존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말이 아니라, 말과 일치된 행동으로 구별된 독창적인 삶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신은 언행일치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 ‘카리스마’다. 카리스마는 이상한 표정이나 움직임, 혹은 자아 전시적인 치장이 아니다. 카리스마는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는 나를 고양시키는 천재다. 미국 예일대학교 심리학 교수로 재직 중 남미 페루 빈민가로 봉사를 떠나고, 다시 하버드대학 종교학 교수로 재직 중 다시 캐나다 토론토의 '데이브레이크'Daybreak 공동체에서 지적장애우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나우웬은 자기를 넘어선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그 대인을 제시한다. 현대인들을 위해 ‘용서容恕’를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용서는 사랑을 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용서는 ‘인간 가족’이라는 연약한 공동체에서 행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나우웬이 지적한 것처럼 자기희생적이며 이타적인 삶을 살진 못하지만, 우리가 용기를 내어 일상생활에서 연습해야 하는 가장 큰 덕목은 용서다. 용서는 상대방이 용서 받을 만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방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다. 자기수련의 궁극적인 증표가 바로 ‘용서’다.

     

내일 공부할 ‘요셉이야기’는 <창세기> 45장으로 주제는 섭리와 용서다.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판 형제들을 보면서, 복잡한 마음을 지녔을 것이다:

     

1절:

“요셉은 자신 곁에 서 있던 모든 이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울부짖었다: 모두 물러 나가십시오. 요셉 곁에서 그들이 물러나가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의 형제들에게 밝혔다.”

     

2절

“그(요셉)이 자신의 목소리를 통곡하는데 두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이집트인들이 듣고, 파라오 왕가가 들었다.”

     

(해설)요셉이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형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긴 사실을 언급하며 다시 목 놓아 운다. 요셉은 아직 어리둥절한 형들에게 입을 열어 말한다.

     

3절

“요셉의 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제가 요셉입니다. 아버님께서 살아 계십니까?” 그의 형들은 아직도 요셉이 누구인지 어리둥절하여, 그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4절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제가 당신들의 동생 요셉입니다. 당신들이 오래전에 저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해설) 요셉이 감정에 북받쳐 오열한 이유는 형들에 대한 분노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셉의 울음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서는 숭고한 울음이다. 숭고한 울음이란 상상할 수 없고, 예기하지 못한 생경한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5절

“자, 이제 진정하십시오. 형들이 저를 오래전에 이곳에 팔아넘긴 것을 슬퍼하지도 자책하며 분노하지도 마십시오. 왜냐하면, 하느님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나를 당신들에 앞서 이곳에 미리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해설) 요셉은 자신의 불행은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정교한 필연必然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집트 전체의 곡식을 관리하는 대신으로 이년동안 지속된 기근이 앞으로 오년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요셉은 자신의 불행은 신의 정교한 계획아래 펼쳐진 필연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이렇게 강조한다.

     

7절

“하느님은 저를 형들보다 앞서 이곳에 보내, 이 땅에서 ‘남은 자’로 오래전에 결정하셨습니다.

남은 자는 위대한 구원으로 형들의 생명을 보존할 것입니다.”

     

(해설) 위 문장의 핵심단어는 ‘남은 자’란 의미의 히브리어 ‘셔에리쓰’( שְׁאֵרִ֖ית)다. ‘남은 자’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스스로 남다른 고통을 당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통의 노예가 되어 삶을 비관하거나 타인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그러나 인생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는 결국 깨닫는다. 자신의 고통은 타인의 구원을 위한 희생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섭리攝理는 ‘남은 자’가 궁극적으로 깨닫는 지혜다. 머리에 달린 두 개의 귀(耳)가 아니라, 고통의 경험을 통해 그 의미를 헤아리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마음 속 싶은 곳에 존재하는 제삼의 귀(耳)로 자신을 덮친 역경의 의미를 곰곰이 묵상하고,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요셉은 운다. 자신의 희생이 거룩하며, 신이 그의 삶을 통해, 형들과 가족, 더 나아가 미래에 이룰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희망의 불씨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넘겨 모두에게 불행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려는 신의 섭리다.

     

8절

“그러기 때문에, 나를 여기에 보낸 분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그가 나로 하여금 파라오의 아버지(고문)과 그 왕조의 주인으로 만들어 모든 이집트 땅을 다스리게 만드셨습니다.”

     

     

사진

     

<요셉이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영접하다>

네덜란드 화가 Salomon de Bray(1597-1664)

1655, 유화, 112 x 88 cm

개인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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