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3.23. (木曜日) “당신은 만행蠻行을 저지르고 계십니까?”
(<바가바드기타> 1.1)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한 가지를 유일한 임무로 알고 꾸준히 하는 자다. 그 꾸준함이 그에게 남들과 비교되지 않는 실력을 선물해 줄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해야 할 한 가지를 모르는 자다. 그래서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서성인다. 한 가지 임무를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마’dharma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산만한 마음을 부정형 접두어 a를 붙어 ‘아다르마’adharma라고 부른다. 다르마를 연마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그날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로 수용하고 집중하고 몰입하지만, 아다르마 상태에서 헤매는 사람은, 시냇물에 떠다니는 부초와 같이 이리저리 흘러간다.
다르마를 실천하는 사람의 행위는 정성이지만, 아다르마 상태의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삶에 만행蠻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바가바드기타>는 성서의 <출애굽기>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처럼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저자가 역사적인 배경은 영적인 의미를 축출하기 위한 도구다. 이 이야기는 두 사춘이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대결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쿠루크세트라’ 즉 ‘쿠루들판’이 델리 북쪽에 위하는 지명으로 지목하지만, 영적인 깨달음과 해탈을 추구하는 수련자에게, ‘쿠루크세트라’는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선과 악의 싸우는 인간의 본성이다.
마부인 크리슈나는 ‘바가반’bhagavan, 즉 신으로 힌두교의 정수이자 베다 지혜의 핵심을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19세기 뱅골 신비수련자인 람크리슈나 파람반사Ramkrishuna Paramhansa는 ‘노래’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단어 ‘지타’gita의 두음절 즉 gi와 ta를 전환하여 ta-gi 혹은 tya-gi로 해석하여 ‘자신이 지상에서 획득했던 소유와 이기심을 버리는 자’로 해석하였다.
<바가바드기타>(BG)는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B)의 23-40장에 해당한다. MB 23-40장은 ‘비슈마파르바’BP 혹은 ‘비슈마의 책’이라고 불리는 18권 책들 중 여섯 번째 책에 해당한다. 비슈마 파르바는 124장으로 구성된 4권의 책으로 이루어졌다. 비슈마 파르바는 18일동안 치러진 쿠루크세트라Kurukshetra 전쟁의 첫 열흘을 기록하였다. 카우라바 군대의 대장인 비슈마는 이 전쟁에서 크게 다쳐 더이상 군대를 이끌지 못한다. 그는 전쟁을 회상하여 자세히 노래한다. BP안에 BG가 포함되어있다. BG는 소위 ‘전쟁 책들’의 시작이며, MB 전체 중 가장 오래된 핵심이야기다. BG는 전쟁을 치루려는 두 군대가 전쟁터에서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다음은 <바가바드기타> 1.1의 음역과 번역이다.
धृतराष्ट्र उवाच |
धर्मक्षेत्रे कुरुक्षेत्रे समवेता युयुत्सवः |
मामकाः पाण्डवाश्चैव किमकुर्वत सञ्जय ||1||
(음역)
dhṛtarāṣṭra uvāca
드리타라슈트라 우바차
dharmakṣetre kurukṣetre samavetā yuyutsavaḥ
다르마크세트레 쿠루크세르테 사마베타 유유트사바하
māmakāḥ pāṇḍavāś caiva kim akurvata sañjaya
마마카하 판다바슈 차이바 킴 아쿠르바타 산자야
(직역)
드리타라슈트라가 말했다:
“그들이 쿠루의 들판, 즉 다르마의 들판에 전쟁을 치룰 목적으로 모였을 때,
산자야여! 나의 군대와 판두 아들들의 군대는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해석)
드리타라슈트라dhṛtarāṣṭra는 ‘쿠루’라는 나라의 왕이며 장님이다. 위대한 경전과 고전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직업은, 그들이 상징하는 가치에 대한 상징이자 은유다. ‘장님’이란 장님에 관련된 특징을 상징하는 단어다. 장님은 실제로 앞을 볼 수 없는 신체적인 장애를 지닌 자이지만, 경전에서는 사리분별 능력이 없는 자란 의미한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장님이란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원래 세상이 암흑뿐이라고 착각한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는 권력, 명예, 그리고 부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장님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인생이란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야할 ‘역할’이라고 여기지 않고 쾌락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 왕이라는 직함이 그를 점점 장님으로 만들었다. 왕이란 직함이 오히려 그를, 권력, 명예, 그리고 부를 남용하는 어리석인 자로 전락시켰다. 그는 육체적인 장님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장님이다. 그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신하이며 현자인 산자야Sanjaya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산자야는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혜의 소유자다.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개안開眼된 자다.
드리타라슈트라가 치리하는 나라 쿠루도 악의와 이기적인 욕망을 상징한다. 그의 자녀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외부의 자극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이 지금 요가수련을 통해 자신을 자제하고 정신적으로 고양된 의로운 판두의 자녀들과 한 판 대결을 준비하려고 보였다. 이들은 ‘쿠루크세트라’라는 평원에 모였다. 쿠루크세트라는 실제 지명으로 델리 북쪽에 위치한 펀잡에 위치한 조그만 평원이다.
쿠루의 군대는 판두의 아들들과 전투를 치루기 위해 진열중이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지혜롭게 정직한 산자야에게 누가 이 전쟁에서 이길 것인가를 묻는다. 이 첫 구절에 등장하는 ‘쿠루크세트라’는 ‘다르마크세트라’dharmaksetra와 함께 등장한다. 이 표현은 새로운 전쟁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제의 시작이다. ‘쿠루크세트라’를 ‘다르마크세트라’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전쟁은 단순히 승리하느냐 혹은 패배하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다르마’dharma를 완수하고 자신 그 전쟁에서 존경받을 만한 용사로 우뚝 설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Kurukshetra는 BG 6.1.1에서 ‘타파흐크세트라’tapahksetra 즉 ‘고통의 평원’으로도 묘사된다. 인생에 가치가 있는 것들은 수고의 결과다. 헌신적인 공부가 지혜가 되고, 오랜 인내를 통해 평정심을 얻게 되며, 고생을 통해 행복을 쟁취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수련하는 자는 한번에 하나씩 자신을 혼돈으로 몰아넣는 해결점이 없어 보이는 상방된 가치들을 안고 그 해결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인간이 자신이 지금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이유를 안다면, 그는 깨어있는 자다. 그(녀)는 그런 행위를 욕망이나 본능을 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숙고를 통해 자기 변화를 위한 ‘의도한 연습’의 한 과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을 옆에서 듣고 보는 주변 사람들도 그 언행의 적당성과 정당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루는 내가 표현한 언행을 숙고하고 완수하는 수련과정이다.
예수는 사랑이 동물인 인간을 신적인 인간으로, 야만적인 인간을 문화적인 인간으로 개조하는 유일한 가치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은 동물적인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숭고한 자신을 드러내는 원동력이다. 1세기 유대인들은 신이 자신들이 건축한 건물 안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공적인 삶을 시작하면서, 제일먼저 장사판이 된 예루살렘 성전을 부수고 삼일만에 다시 건축하겠다고 말했다. 성전은 땅에 짓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세우는 것이다. 성전이란 오래된 자아를 유기하고, 새로운 자기-자신을 세워야할 인간의 마음이다. 보이는 건물 안에 신이 존재하고, 기록된 경전과 그것을 해석해온 학자들의 해석만이 신의 모습이라고 신봉하던 유대인들은, 그런 예수를 십자가 처형하였다. 골고다 언덕에 꽂혀있는 십자가위에서 사람들을 보고 외친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잘지 못합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신에게 기도하였다.
드리타라슈트라가 치리하는 나라 ‘쿠루’라는 나라는 이기적인 욕망과 그 안에서 탄생한 시기, 질투, 그리고 악의에 대한 은유다. 그의 자녀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외부의 자극에만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이 수련을 통해 자신을 자제하고 정신적으로 고양된 의로운 판두Pandu의 아들들과 전쟁을 벌일 참이다. 이들은 ‘쿠루크세트라’라는 평원에 모였다. 쿠루크세트라는 실제 지명으로 델리 북쪽에 위치한 펀잡에 위치한 조그만 평원이다. 쿠루의 군대는 판두의 아들들과 전투를 치루기 위해 진열중이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산자야에게 누가 이 전쟁에서 이길 것인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은유적이다. 영적인 수련을 통해 자기-실현을 이루고자 훈련하는 장님 수련자(드리타라슈트라)는 자신의 언행을 지켜보고 조언해줄 스승(산자야)이 필요하다. 그는 자신이 하루 동안 입을 통해 나오는 말, 그리고 손발과 몸을 통해 저지른 행동을 점검하면서, 그 이상적이며 현명한 스승에게 검점을 받는 다. 산자야는, 정직하고 공평한 숙고를 통해 왕의 언행을 분석하고 그 마음속에 용호상박하는 두 가지 마음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그것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로, 즉 절제와 탐닉, 지적인 결심과 감정적인 충동, 명상을 통한 영적인 혜안과 그것을 거부하고 방해하는 정신적인 저항, 그리고 신적인 자아인식과 이기적인 본능에 쉽게 끌려가는 무식과의 대결이며 전쟁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이 대결하는 장소가 ‘쿠루크세트라kurukṣetra’다. ‘크세트라’는 ‘들판; 평원’, ‘쿠루’는 ‘행동하다’라 의미를 지닌 동사 ‘크르’kŗ에서 유래했다. ‘쿠루크세트라kurukṣetra는 드리타라슈트라가 다스리는 왕국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기능이 작동하는 들판이란 뜻이다. <바가바드기타>(BG)에서 ‘쿠루의 들판’은 동시에 ‘다르마의 들판’이란 의미를 지닌 ‘다르마크세트라dharmakṣetra’라고도 불린다. ‘다르마’는 ‘정의; 덕; 거룩’이란 의미로 ‘다르마크세트라는 ’정의가 실현되는 들판‘이라는 뜻이다. 인간에게 하루는 자신의 덕을 닦는 전쟁터다.
‘쿠르의 들판’은 생계를 위한 세속적인 책임과 활동을 의미하고 ‘다르마의 들판’은 자기실현을 위해 영적인 훈련과 활동이다. 이 두 장소는 해탈을 원하는 수련자의 마음속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두 가지 마음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붓디’buddi라는 ‘깨달음’ 혹은 ‘깨우침’과 다른 하나는 오감을 기반으로 형성된 ‘마나스’manas라는 ‘마음’이다. 순결하고 분별력이 있는 깨달음은 ‘붓디’는 BG에서 비유적으로 ‘판두의 아들들’이다. 판두는 영웅 아르주나Arjuna와 그의 네 형제들의 아버지다. 이 다섯 형제는 ‘자기실현’을 위해 외부로 향한 생각을 제어하고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는 ‘니브르티’nivritti를 수행하는 자들이다. ‘판두’Pandu라는 산스크리트어 단어는 ‘백색’을 의미하는 ‘판드’pand에서 파생한 단어로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한없이 빛나는 영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마나스’는 장님 드리타라슈트라와 그의 100명의 아들들을 상징한다. 이들은 자기실현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쟁취하는 경쟁하고 오감을 만족시키는 ‘브라프리티’pravritti의 삶을 추구한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성된 ‘마나스’는 인간을 외부의 자극에 자연스럽게 이끌리게 만드는 자석이다. ‘마나스’가 발생하는 장소를 인간의 뇌에서 굳이 찾는다면, ‘폰스 바롤리’pons Varolii다. 이탈리아 해부학자 코스탄쪼 바롤리오 Costanzo Varolio (1543–75)의 이름을 따 ‘바롤리의 다리’ 혹은 ‘뇌교腦橋’로뇌간腦幹의 일부다. 뇌교는 소외와 골수 사이에 위치하여 오감으로 감지한 정보를 신경계를 통해 신체의 각 부분에 내보는 운동신경이며 연결고리다. 인간은 진선미를 추구하려는 영혼인 ‘붓디’를 소중하여 여기고 수련하지 않으며, 외부의 자극에 끊임없이 휘돌아 치는 ‘마나스’의 노예가 되어 자극이 만들어낸 허상인 ‘마야’maya속에서 길을 잃은 지도 모르고 헤맨다.
쿠루의 왕 드리타라슈트라는 ‘마나스’의 지배를 받는 ‘마야’의 왕이다. 그의 이름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 그의 이름은 ‘사로잡힌’이란 의미를 지닌 ‘드리타’dhṛta와 ‘왕국’을 의미하는 rāṣṭra의 합성어로 그 의미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왕국을 다스리는 자’란 의미다. 그가 탄 전차는 ‘마나스’을 의미한다. 몸은 전차이고 영혼은 전차의 주인이며, 깨달음은 전차를 모는 전사이고 오감은 말이다. 인간의 마음이 장님이 이유는 오감이나 이성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전사가 판단한 장소로 가기 위해 말은 항상 제어되어야한다.
‘산자야’만이 전차가 가야할 길을 알고 있다. 이기심에서 벗어난 그는 사물과 사건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는 신적인 통찰력의 상징이며 자기실현을 완수하고 싶은 수련자다. 그는 외부를 판단하기 전에 외부를 판단하는 자신을 먼저 분석하고 숙고한다. 그는 스스로 별도의 공간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고독의 상징이며 삼라만상을 편견이 없이 관찰하고 사심이 없이 판단한다. 숙고는 통찰의 힘으로, 대상을 보고 반응하는 자신을 깊이 보는 능력이다. 숙고는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숙고는 직감으로 분명하고 선명하게 느낀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산자야에게 질문한다.
kim akurvata sañjaya
“산자야야! 그들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왕은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과거에 인도 북부 펀잡의 ‘쿠르크세트라’ 평원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전투를 지칭하고 있다. 브야사는 ‘아쿠르바타’akurvata라는 동사형을 사용하였다. ‘아쿠르바타’는 ‘하다’란 의미는 지닌 어근 kŗ의 ‘3인칭 복수 과거 중간태’를 사용하였다. ‘했다; 저질렀다’라는 의미다. 우선은 시제가 현재가 아니라 과거다. 만일 그들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라면 현재중간태인 ‘쿠르바테’kurvate 혹은 현재능동태인 ‘쿠르반티’kurvanti를 사용했을 것이다.
왕은 “산자야야! 그들이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느냐?”라고 묻지 않았다. 만일 브야사가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였다면, 그 사건은 오늘의 시점에서 지나가 버린 과거 일이다. 그러나 브야사가 과거형 동사 ‘아쿠르바타’를 사용하여, 현재 일상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계속 관찰하고 숙고하고 있다는 마음가짐을 표현하였다.
‘아쿠르바타’는 능동형도 수동형도 아니, 중간태다. 중간태동사의 주어는 동시가 그 동사의 목적어가 될수도 있다. ‘킴 아쿠르바타’는 ‘그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란 의미다. 오감의 자극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선하고 의로운 일이라고 착각한다. 만일 수련자가 자기완성을 위한 각성수련을 하지 않는다면, 그가 아무리 정의롭고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은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매 순간 ‘붓디’와 ‘마나스’의 전투를 벌이고 있다. 자기가 누구인줄 모르고 자기실현의 수련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행위는,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지 모른다. BG는 아직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아름답고 장구한 시다. 그리고 이 서사시를 읽는 나에게 되묻는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저지른 만행蠻行을 관찰하셨습니까?”
コメン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