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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21. (火曜日) “자기변모自己變貌의 세 단계”

2023.3.21. (火曜日) “자기변모自己變貌의 세 단계”

오늘은 작년까지 매일 산척해던 가평 사룡리 산채 길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가는 길이나, 낯설다. 한동안 가지 않았더니, 인연이 끊어진 것 같더니, 오늘은 천생연분같은 산책을 감행하였다. 내가 이 산책길에 보고 싶은 나누가 한구루 있다. 복숭아 나무다. 매력적이며 탐스러운 복숭아를 탄생시키던 나무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역시! 베토벤의 머리카락처럼 천방지축이던 가지나 나를 반긴다.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뻣어나가지만, 그 뿌리는 보이지 안흔 저 깊은 심연에 박았다. 세월이 이 복숭아 나무에게 셍명의 문법을 가르쳤다.

삶은 배움의 세월이다. 자연은 계절에 따라 자기 변모와 혁신을 감행주고, 천체는 정해진 궤도를 여행하여 불변과 반복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행으로, 우리가 삼가야할 언행을 알려주는 스승들이다. 유대 랍비 힐렐의 말대로, 모든 사람이, 모든 사물이 스승이다. 새로운 지식을 통해 삶에 적용하는 지혜 수련인 배움은 인간의 도리이자 의무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어제의 자식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간절한 노력없이, 인간은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퇴화한다. 우주의 주인인 시간이 빅뱅으로 우주를 탄생시킨 후에, 한 번도 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도 시간을 마구 흘러, 현재라는 지점을 과거가 되어버렸다.

탈무드는 누가 스승이냐라는 질문에, 누구나 스승이다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만물로부터, 자기혁신의 위한 가르침을 쉽게 획득하기 힘들다. 가장 손쉬운 방법들 중에 하나가, 인류의 최고의 스승들이 남긴 고정과 경전으로부터 삶의 나침반羅針盤을 찾고, 그것이 진정 자신에게 어울리는 해도海圖라면, 그 내용을 깊이 명상하여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연습이다. 인류의 최고의 스승이란, 경전과 고전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해온 원석으로, 수많은 사상가, 문필가, 예술가, 혹은 성현들이 남긴 ‘클래식들’이다. 혹은 우리 주위에서 언제나 침묵하며 우리의 탐색을 기다라는 산천과 동식물들이다. 자연은 언제나 자신을 내어주는 자비의 화신이며 동식물은 생명의 오묘한 질서와 미를 몸소 보여주는 예술작품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자신들이 머리와 오감으로 감지한 세상을 가슴의 지혜로 변모시키는 과정을 다른 세 단계를 통해 설명한다. ‘슈라바남shravanam-마나남mananam-니디댜사님nididhyasanam’. 이 구절을 번역하자면 ‘경청傾聽하기-숙고熟考하기-명상瞑想하기’다. 이 삼 단계는 매일 배움의 도구일 수도 있고, 혹은 평생교육을 통해 순차적으로 획득되는 진화적인 단계일 수도 있다.

‘경청傾聽’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 타-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다름을 배우려는 마음이다.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 외부의 소리를 그저 들으려는 안일함이 아니라, 나의 두 귀를 상대방의 입과 심장에 가져가는 수고를 통해 얻는 혜안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다르다. 산에 있는 나무가 모두 생김새가 다르듯이, 인간도 무척 다르다. 그 다름은 우열의 대상이 아니다. 인간 문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이 다름의 인정이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정치관, 다른 종교관, 다른 세계관, 다른 인생관을 지닌 사람을 무시하는 이유는 무식해서다. 깊은 교육과 숙고를 통해, 자신과는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가만히 응시한 적이 없기때문에, 스스로가 독보적이며 독창적인 존재이며, 상대방도 독보적인 존재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은 타인의 다름을 틀림의 대상으로 더 나아가 타도의 대상으로 여긴다. 우리가 사는 IT세계는 전례 없이 동일한 생각과 행태를 강요한다. 순응이 덕인 획일주의에 다름과 불순응은 타도의 대상이다.

‘숙고熟考’는, 그 다름의 원인을 조심스럽게 찾아가는 수고다. 숙고는 자신이 봉착한 문제를 즉흥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거나, 타인들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해결책에 승복하는 행위가 아니다. 숙고는 그 문제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을 더듬어 알아내고. 그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려는 노력이다. 숙고는 그 문제를 해결解決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각으로 해소解消시켜버린다. 자신을 삶을 깊이 숙고하는 사람에겐 안 풀릴 문제가 없다. 그(녀)에겐 오히려 인생의 위기가 기회이며, 불행이 행복의 시작이다. 혹은 거꾸로 성공은 실패가 기다리고 있으니 우쭐하지 말하는 경고이며 행복은 순간적이니 조용하게 그런 행복을 가져다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라는 충고다.

숙고는 의도적인 선택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숙고없이 되는 일은 없다. 성급하거나 과도하다. 숙고는 그런 의미에서 중용中庸이다. 다이달로스의 아들 이카로스는 자신의 날개가 밀랍으로 만들어진지도 모르고, 비행의 기쁨을 만끽하며 태양에 다가가, 날개나 놀아 추락하였다. 인간에게 가장 힘든 덕목은 ‘적당適當’이다. 적당은, 일을 대충 해치우자는 막무가내가 아니라,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절제다.

‘명상瞑想’의 눈을 가지고 외부가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보려는 수련이다. 수련자는, 더 이상 어제의 욕망을 표현할 흙덩이리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빛나는 보석을 발굴하기 위한 밭이다. 명상이란, 겉에 거추장스럽게 붙어있는 불순물을 인정하는 용기이며, 그것을 제거해버리는 단호함이다. 명상을 수련하는 자는, 스스로에게 가장 혹독한 목격자, 관찰자, 그리고 심판자다. 그에게 미래는 막연히 내려앉는 안개가 아니라, 자신이 도달해야 할 천상의 예루살렘이다. 그는 자신이 서있는 장소가 그곳을 가기 위한 출발점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명상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콘템플레이셔’contemplation의 의미는 심오하다. 오래된 자신을 불사르기 위해 델피 신전 위에 놓고 저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는 독수리의 눈을 획득하는 것이다. 명상은, 나를 독수리의 눈으로 찍어보는 훈련이다. 나는 내가 가고자하는 목적지를 행해있는지, 나는 그 도중에 있는지를 가만히 응시하려는 용기다. 하루는 경청, 숙고, 그리고 명상을 통해, 간결하고 강력한 자기변모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나는 자연과 타인을 경청하는가? 나는 내 성급한 결정을 숙고하는가? 나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는가? 독수리의 눈으로 나를 가만히 보는가?

사진

<가지를 하늘 높이 드리운 복숭아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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