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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20. (月曜日) “도중道中” (<바가바드기타> V.12)

2023.3.20. (月曜日) “도중道中” (<바가바드기타> V.12)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한 종류는 과거의 자신이나 현재의 자신이 우연이며, 그 우연을 자기 삶의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자신을 발굴하고 연습하는 자다. 그(녀)에게 중요한 장소는 여기이며, 그에게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다. ‘여기’가 그에게 천국이며 극락이고 ‘지금’이 자신에게 주어진 우주가 창조된 빅뱅의 순간이며 우주가 소멸한다는 종말이다. 그는 궁수의 활에서 떠난 화살이나,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무심코 비행하는 북극 갈매기처럼, 바람을 가르며, 날개를 퍼뜩이는 그 찰나가,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시간과 공간이란 사실을 안다. 한마디로 자신에게 주어길 길, 그 길위에서 초연하고 의연하게 걸어가는 자다. 도중道中에 있는 자다.

다른 종류의 인간은 자신에게 우연히 주어진 과거와 그 과거가 만들어낸 욕심이 안주한다. 혹은 그 욕심에 중독이 되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우울, 분노 혹은 이런 감정들을 극복하기 위해 비이성적이며 즉흥적인 심리적 자극에 중독되어 하루를 그럭저럭 보내며 연명한다. 그가 자랑할 것은, 자신의 과거이자 과거가 이루어낸 업적들이다. 학력, 저금통장, 아파트 평수, 잘나가는 자식들, 이름도 모르고 더욱이 뜻도 모르는 명품으로 휘감은 장식들이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된 착각이 그의 주인이 되어, 그를 이리저리로 가라고 명령하면, 그 말에 기꺼이 노예가로 전락한다.

첫 번째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과정過程이다. 그는 과정이 결과이며 목적지란 사실을 잘 알기에, 한 걸음, 한 동작, 한 눈길,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혼자 있을 때 하는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행위가 곧 자신의 수준이며, 자신의 개성이란 사실을 한다. 그러기에 그런 인간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정의 지속은 하루를 온전히 맞이하기 위해,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신만의 방석에 올라, 발은 땅을 디디고 있지만 머리는 하늘로 승천하기를 기도한다. 나는 오늘을 종말론적으로 살 것인가? 나는 여기를 천국으로 만들 것이다.

두 번째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結果다. 사회는, 공동체는, 도시는, 국가는 주식회사다. 자신이 투자한만큼 수익을 얻기 위해, 애쓰며, 그 약육강식의 승자가 착한 자이며 슬기우운 자로 존경을 받는다. 그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숫자, 경쟁, 독점이다. 그에게 신에 있다면, 그 신은 결과다. 과정이야 어떠하든, 결과가 진선미라고 스스로 위안한다.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도 유사한 생각을 지녔기 때문에, 사회에선 목적과 결과가 좋으면, 동기와 과정이 미흡해도 허용된다.

<바가바드기타> V장에서 크리슈나는 본격적으로 아르주나에게 ‘요가’의 의미를 알려준다. 요가는 신체, 정신, 그리고 영혼에 대한 총체적인 훈련이다. 요가수련은 완벽한 자기-자신을 조각하기 위한 훈련과정이다. 완벽이란 완벽을 연습하는 과정이지, 완벽이라는 것을 오감으로 획득하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결과가 아니다. 크리슈나는 영웅이 되려는 아르주나에게 <바가바드기타> V.12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युक्त: कर्मफलं त्यक्त्वा शान्तिमाप्नोति नैष्ठिकीम् |

अयुक्त: कामकारेण फले सक्तो निबध्यते || 12||

yuktaḥ karma-phalaṁ tyaktvā śāntim āpnoti naiṣṭikīm

ayuktaḥ kāma-kāreṇa phale sakto nibadhyate

유크타하 카르마-팔람 트야카트바 샨팀 압노티 나이쉬티킴

아육타하 카마-카레나 팔레 삭토 니바드야테

(직역)

요가수련을 한 자는, 즉, 행위의 열매를 포기한 자는, 가장 높은 평정심을 획득한다.

요가수련을 하지 않는 자는, 즉 욕망을 위한 행동하는 자는, 열매에 집착하여, 구속된다.

(의역)

요가를 수련한 자는 이런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행위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그 과정을 즐긴다. 자신이 하는 찰라가 바로 결과이자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는 이 세상의 누구도 획득할 수 없는 천상의 평정심을 이미 즐기고 있다.

반면에, 요가를 수련하지 않는자. 즉 자신의 삶에서 절제와 수련을 알지 못하지는 자는,

항상 어제의 자신에 훈습이 되어 있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그 욕망을 무의식으로 반복하는 중독자다 된다.

그런 자는, 항상 결과, 숫자, 비교, 경쟁, 체면의 노예가 되어 자신이 아니라, 외부라는 허상의 노예다.

그는 겉보기에는 자유로운 것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만든 초라한 집에서 자신을 감금한 자다.

(어휘)

yuktas 과거분사(m.sg.nom. p.pass.part.): ‘요가를 수련하여 자신의 몸에 스며든 자’ <√yuj ‘요가를 수련하다’

karma-phalam 명사 (n.sg.acc.); ‘행위의 열매’ < √karma ‘행위’ + phala ‘열매; 결과’

tyaktvā 동명사; ‘포기한; 버린’ < √tyaj ‘버리다; 포기하다’

śāntim 명사 (f.sg.acc.); ‘평정; 평화’

āpnoti 동사(3sg. pr.indic.act.); ‘도달하다; 획득하다’ √āp-

naiṣṭikīm 형용사(f.sg.acc.) ‘마지막, 완벽한, 최선의’

ayuktas 형용사(m.sg.nom.p.pass.part); ‘요가를 수련하지 않은 (자) < a-부정접두사 +√yuj ‘묶다’

kāma-kāreṇa 명사(m.sg.inst.): ‘욕망에 이끌린 행위’

phale 명사(n.sg.loco.); ‘열매; 결과’

saktas 분사(m.sg.nom.p.pass.part.): ‘집착하는’ < √saňj ‘집착하다; 달라붙다’

nibadhyate 과거분사(3sg.pr.indic.pass.part.) ‘묶여있는’ <ni + √bandh ‘묶다’)

(해설)

요가를 수련하는 자는 완벽한 자신을 위해 매일매일 수련하는 자다. 자신이 완벽한 요기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에게 ‘오만傲慢’이라는 아수라가 찾아와, 그의 모습과 모양을 금새 무너뜨린다. 그가 취해야 할 마음 가짐은 무념무상의 상태다. 삼매三昧는 여기-지금에 자신에게 주어진 한 가지에 집중하려는 마음이며, 그 마음을 한동안 지속시키는 몰입일 수 밖에 없다.

어린아이처럼, 자신이 하는 아사나가 놀이이며, 어제까지 수백번 수천번 반복을 했더라도 그에겐 처음으로 하는 동작이다. 그 동작은 마치 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스스로 돌아가고, 그가 하는 모습은 순수하고 순진하다. 그런 수련자에 주어진 만트라는 ‘나는 할 수 있다’라는 ‘거룩한 긍정’이다. 어떤 행위를 하는데,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무한한 완벽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란 사실을 시인하고 이내, 다시 수련으로 진입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자신이 수련을 통해 무엇을 얻겠다고 하는 마음이 생기면, 온전히 그 순간을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이란 42.195km 마라톤을 뛰지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바로 결승지점이라고 여기며, 마의 구간인 30km에 도달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천사인 도파민의 도움으로 삼매에 진입하여, 고통을 잊는다.

그 상태가 바로 ‘평정심’이다. 평정심은 사적이며 독창적이고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 신의 선물이다.

평정심을 의미하는 ‘샹티’ शान्ति (śānti)는 ‘조용; 평화; 평정; 휴식’이란 의미로 산스크리트어 동사 ‘샴’शम् (śam)와 추상명사형 어미인 –ti의 합성어다. ‘샴’의 근본적인 의미는 ‘몰입을 통해 최선을 경주하여 온몸이 소진되어, 조용해지다’란 의미다. 이 어근은 원-인도유럽어 어근 *ḱemh₂-에서 궁극적으로 왔다. 우리가 간절하게 하고 있는 일에 몰입했을 때, 그 후에 우리에게 가다오는 긍정적인 피곤이다, 이 피곤을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는 유일한 문이다. 매주 금요일 요가수련은 마이솔 프리이머리 레드 클레스다. 한 시간 반동안 동작을 숨가쁘게 따라 하면, 그 후에 몸, 정신, 영혼이 완전히 소진되어, 몸을 메트에 누이면, 잠시 저절로 숙면하게 된다. 시체자세인 샤바사나 शवासन;(śavāsana)가 ‘샹티’다. 잠시 눈을 감았지만, 몸이 완전히 회복될 뿐만 아니라, 어제보다 좀더 개선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에 요가를 수련하지 않는 자, 즉 자신의 삶에서 온 정성을 다해 몰입할 수 있는 궁극의 일을 발견하지 못한자, 발견하였다 하더라고, 이런저런 핑계로 게으름을 피는 자는, 자신의 경험으로, 혹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지만, 습관이 되어버린 버릇으로 오감을 자극하는 욕망에 중독되어있는 자다. 나쁜 중독은 모든 물을 빨아들이는 하수구와 같아 우리를 알지 못하는 저 어두운 곳으로 몰아친다.

그에게 인생의 모토가 있다면 성과成果이며 성과에 도달하는 심리적인 만족감인 성취成就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친구와 경쟁하여, 그 대상보다 많은 결과를 숫자, 독점으로 보여주려고 애를 쓴다. 그의 경쟁자는 자신이 되어야한 자기-자신이 아니라, 외부에 있는 허상이다. 그 외부는 언제나 힘겨운 대상으로 등장하여, 그의 신체, 정신, 그리고 영혼을 고갈시킨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성취하는 것같지만, 더 큰 성과가 숫자로 등장하여, 그를 영원한 노예로 전달시킨다. 봄을 가장 먼지 알린다는 올괴불나무 꽃이 나를 만긴다. 하늘이 아니라 지금 여기 순간에 몰입하여 나에게 뭍는다. 당신은 도중입니까? 아니면 목표만 설정하고 안달하고 있습니까?

사진

<가평 야산 올괴불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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