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2.1.(水曜日) “NowandHere”
어제 저녁에 도반들과 함께 공부한 <요가수트라: 삼매품> 경구 1은 이렇다: अथ योगानुशासनम् ॥१॥
“아타 요가-아누-샤사남”‘아타’는 <요가수트라> 전체의 시작을 알리는 표식이다. 요가의 최고 경전을 편집한 파탄잘리Patanjali는 첫 번째 단어를 무엇으로 시작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창세기의 ‘브레쉬쓰’(처음에)나 일리아스의 ‘메닌’(분노) 혹은 베르길리우스의 ‘아르마 위룸케 카노’(전쟁과 영웅)처럼 서사시 전체의 소개이면서 주제를 떠오르게 만드는 ‘영원한 낱말’ 하나를 추적했을 것이다. 이 첫 문장을 직역하면, “이제, 요가수련”이다. 학자들은 이 첫 문장을 195경구 전체의 제목처럼 “요가수련”이라고 번역한다.
아타atha는 일종의 외침이다. 100m선수가 출발선상에서 숨을 죽이고, 시작 총성을 기다리는 선수들의 심장소리다. 아타는 온몸에 힘을 빼고, 두 손의 손가락은 하얀색 페이트를 칠한 출발선에 대고 양발은 엇갈리게 디딤대에 올려놓는 정성이다. 먹잇감을 발견한 표범이 한 걸음 한 걸음 고요히 접근하는 발자국 하나다. 아타는 시간과 공간이 사라지는 절체절명의 찰나刹那다. 이 찰나를 인식하지 못하고 총성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다면, 그는 뒤 쳐질 수 밖에 없다. 이 첫 문장을 풀어쓰면 이렇다: “자, 여러분, 정신을 차려보십시오! 요가는 이것입니다. 지금-여기에 몰입하는 신체, 정신, 그리고 영혼을 자기-극복과 자기-승화를 성취하려는 전인적인 훈련입니다.”
아타는 언어 외 언어다. 비록 문자로 표기되었지만, 그것은 마치 느낌표나 물음표처럼, 언어 밖의 언어다. 아타는 눈이 소복이 쌓인 야산을 지날 때, 저 높은 잣나무 가지에 쌓인 눈을 흩어 떨어뜨리는 겨울바람이다. 눈가루는 그 바람에 몸을 맡겨 자유롭게 자신에 가야 할 땅으로 둥실둥실 하강한다. 아타를 굳이 단어로 번역하자면, ‘지금只今-여기’다.
지금은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인간은 지금을 산다. 우리는 조금 전까지 지나간 지금을 살아왔고, 미래는 다가오는 지금이다. 지금이란 영어단어 ‘now’는 ‘새롭다; 예상 밖이다; 신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new와 같은 어원이다. 우주 탄생의 빅뱅 순간을 묘사하는 ‘노바’nova도 이 단어에서 왔다. 단테가 인간의 가장 숭고한 가치인 사랑이 종교나 건물에 있지 않고 한 개인의 사적인 감정 안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을 ‘누오바’nuova라고 불렀고, 그 깨달음을 간직하고 매 순간을 사는 간절한 인생을 ‘위타 누오바’vita nuova라고 불렀다. 그것은 동굴에 갇혀 누군가 조작한 그림자를 보고 실제라고 세뇌당한 죄수가, 자신을 얽매는 쇠사슬을 목에서, 팔에서, 그리고 팔에서 풀고, 저 동굴 입구에서 희미하게 침투하는 빛을 향해 뒤로 돌아보는, 그 순간이다. 플라톤은 이 깨달음의 찰나를 ‘엑사이프네스’ 즉 ‘갑자기’라는 그리스어 부사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그런 갑작스런 시간인 ‘지금’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구별된 장소가 바로 ‘여기’다. 여기는 ‘지금’이라는 거룩한 갑작스러움을 인식하면, 덤으로 선물로 주는 궁극의 장소다. ‘여기’는 ‘지금’을 인식하기 위해,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 수련하는 인간이 있는 바로 그 장소다. 우리가 매일 아침 정성을 모아 기도를 드리는 하얀 방석이며, 요가수련자가 전인적인 변신을 위해 들숨과 날숨을 교차시키며 온몸을 움직이는 요가메트다. 혹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일터이며,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느닷없이 찾아온 불행과 고통의 시간이기도 하다. ‘여기’는 다음 ‘여기’를 구축하기 위해 유일한 통로다.
‘아타’를 위해 선택한 시가 있다. 마이트터 에크하르트의 ‘여기와 지금’이라는 시다.
Here and Now
Meister Eckhart
Everything hangs on the little word
here and its sibling now,
but I often forget this,
keeping busy with my plans,
building for a future
I cannot know and
against worries I cannot
finally tame,
and yet You wait for me to
come home to Your now
which is beyond past and future,
and return to Your here
which is present before beginning
and beyond every ending.
모든 것은 이 조그만 단어에 달려있습니다.
‘여기’와 그것의 자매인 ‘지금’입니다.
그러나 저는 종종 이것을 잊습니다.
제 계획으로 미래를 설계하느라
바빠서 그렇습니다.
저는 알 수 없고
마침내 걱정 때문에, 이 순간을 물과 같이 유순 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기다리며
‘당신의 지금’으로 오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과거와 미래를 넘어서
‘당신의 여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처음부터 있어 왔고
모든 끝을 넘어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내가 가진 유일한 시간이고 여기야 말로 지금을 깊이 응시할 때, 향유할 수 있는 파라다이스이다. ‘지금과 여기’ NowandHere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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