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5.(金曜日) “송해”
지난 가을에 충남 당진 면천창고 모가당에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였다. 고등학교 선배님이신 김익진교수님께서 주선하여 나, 스페인문학 전공자 윤준식교수님, 그리고 단국대 영문과 교수이자 시론가인 오민석교수님, 그리고 김교수님이 강의하였다. 오늘 저녁, 이 세분을 만났다. 우리 동네 미슐랭 그리스식당인 ‘깔로께리’에 모였다. 깔로께리는 내 인생의 지적 탐험의 동반자인 김현수교수님께서 운영하시는 놀이터다.
나는 서울에 일이있어 늦게 깔로께리에 늦게 도착하였다. 그 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미 유익한 이야기 꽃이 만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모임에 늦게 도착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오민석교수님을 처음 뵈었다. 그는 이 학문적으로 척박한 한국에서 문화연구로 외연을 확장하시고 밥 딜런에 대한 책과 ‘전국노래자랑’의 간판 송해선생님의 사상에 관한 <송해평전>을 쓰셨다. 집에 돌아와 이 책을 인터넷으로 구입하였다.
내가 한동안 일요일 낮 시간에 즐겨보는 프로가 <전국노래자랑>였다. 종교시설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재미가 없어 혼자 경전을 읽다, TV를 틀면, 델피 신전의 사제가 등장하였다. 그가 송해선생님이었다. 우리의 진솔한 모습이 가감이 없이 다 드러내도록, 스스로 망가지는 선생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21세기 사제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 선생님의 인도와 허락으로 누구나, 나와, 이때다 싶어, 자신도 모르는 적나라한 끼를 발산하는 동료 인간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을 보면서 속으로 ‘별의별 인간 군상들이 많구나!’라고 말하며 나의 도덕적-사회적 우월감을 확인하면서도 동시에 ‘저렇게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는 인간이 있다니!’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잠깐 행복을 부러워했다. 오늘 오교수님께서 일년동안 송해선생님을 밀착취재면서 평전을 쓰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프로그램의 알파와 오메가는 송해라는 인간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송해는 최고령 TV 음악 경연대회 진행자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일찍이 전국을 돌아다니는 악단의 딴따로, 때론 연기자로 때론 사회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시작하였다. 그에게 인생의 위기가 왔다. 1986년 아들을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그가 실의에 빠져있을 때, <전국노래자랑>이 부활한 아들처럼, 그를 찾아왔다. 1988년 5월부터, <전국노래자랑>을 사회를 맡아 35년을 진행하셨다. 이 프로그램의 철학이 있다. 누구나,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무대 밑에 마련된 플라스틱 의자에 공평하게, 표시않나게 앉아야 한다.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무엇이든지 허락된 무대를 선물로 받는다. 일상에 지친 한국인들이 이 무대에 올라와 자신이 오롯이 자신이 될 수 있고, 그것을 함께 즐거워하는 천국을 마련하신 분이 송해선생님이셨다.
오교수님께서 송해선생님의 특이한 습관 두 가지를 알려주셨다. 첫째는 목욕탕 들르기다. 이 프로그램은 전국을 돌아 다니며 진행하기에, 60-70명 정도가 녹화 전날 지방으로 내려가 항상 ‘허름한’ 모텔에서 묶는다. 선생님은 항상 그 동네 목욕탕을 찾아, 열탕과 온탕을 번갈아 들어가면서 녹화를 준비하셨다. 그에겐 <전국노래자랑>은 그가 대한민국 국민에 드리는 예배였고, 그 예배를 인도하는 사제였다. 이 예배를 구성하는 반주와 노래는, 일상에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는 찬송가였다.
둘째는 알약과 물약 복용이다. 선생님이 녹화 당일 목욕재계한 몸으로 현장에 등장하시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완벽주의자이셨던 선생님은, 모든 상황을 점검하시고, 녹화 2시간 전부터,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혼자 대기실에 계셨다. 35년동안 진행하셨지만, 난생처음 사회를 보는 것처럼 긴장하셨다. 아니 긴장을 하도록 스스로 습관을 만드셨다. 그래야, 녹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셨다. 오선생님은 그때 동네 약국을 들러, 선생님을 진정시키기 위해, 알약하나와 물약하나를 구입하셨다. 그는 제일 비싼 우황청심환 한 알과 감기약 판피린 한 병을 사와야 했다. 이 두 약을 상극이라 함께 복용하면 안되는 조합이다. 이 두 개의 약은, 소크라테스의 독배였다. 선생님은 이 두 약을 복용하면서, 모든 공연을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여기셨을 것이다.
오교수님이 다름주엔 스페인을 들러 포르투칼을 가신단다. 돌아오시기 전에, 송해편전을 읽고, 더 많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듣고 싶다. 나도 무엇인가 35년동안 즐거이,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
<깔로께리에 모인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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