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군더기가 없다. 낙엽과 나뭇가지가 아무렇게나 뒹구는 것 같지만, 며칠 지나면, 자신만의 자리를 잡아, 자신에게 성큼 다가온 운명을 감사하고 침묵한다. 산은 거대한 침묵이고 시냇물은 지속적인 감사의 노래다. 한자로 시詩는 인간이 목욕 제계하고 산사에 올라 신에게 드리는 간곡한 말이다. 그 말은 간결해야 한다. 중언부언하지말고 그 핵심을 찔러야 한다. 영어로 시를 의미하는 poem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생각을 통해 만드는 창작’을 의미한다. 자연이 그렇듯이, 꼭 필요한 생각을 언어로 옮기는 예술이다.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의 시가 그렇다. 17세기 하아쿠 시인 마츠오 바쇼처럼 간명하고 감칠나다. 올리버는 ‘기도prayer’가 아니라 ‘기도하기praying’를 노래한다. ‘기도’는 명사이고 ‘기도하기’는 동사에 가까운 동명사로 ‘기도를 하는 중’이란 뜻이다.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종결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올리버는 <기도하기Praying>라는 시를 통해, 인간이 간절하게 염원하는 마음가짐과 대상을 표현하고, 시란 무엇인가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보다 선명하게 설명하여 나의 해석을 유도하는 여운을 남긴다.
Praying기도하기
메리 올리버
It doesn’t have to be
the blue iris, it could be
weeds in a vacant lot, or a few
small stones; just
pay attention, then patch
a few words together and don’t try
to make them elaborate, this isn’t
a contest but the doorway
into thanks, and a silence in which
another voice may speak.
“그것이 파란 붓꽃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빈 부지의 잡초雜草일 수 있습니다. 혹은
조그만 돌일 수 있습니다. 단지
몰입沒入하세요. 그런 후, 몇 단어들을
함께 끼워 맞추세요. 그것들을
정교하게 만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은
논쟁이 아니라 감사感謝하기 위한
문간門間이며 다른 목소리가 말을 거는
침묵沈默입니다.”
시는 기도하기다. 아멘으로 마치는 완결된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이 아니라, 내가 지금 생각을 더듬어, 심장에서 출발하여 목구멍을 통해 구강의 여러 곳과 혀가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문자로 옮긴, 한 인간의 살이자 피다. 지금 만들어지고 있기에 진행형이다. 그러기에 남들이 좋다고 환호하는, 신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해 무지개를 타고 여행하는 아이리스, 파란 붓꽃일 필요가 없다.
나만의 시를 짓기 위해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려진 땅, 빈 부지면 충분하다. 그곳에 돌짝 틈새를 타고 고개를 내미는 잡초이거나 조그만 돌이면 된다. 이들은 충분히 시를 자아낼 수 있는 어머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방금, 갑자기 생각하는 것들을 흘려보내지 말고 이리저리 맞추면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이 말도 안되는 자신감과 용기다. 운율, 각운, 음보, 은유 따위를 염두에 둘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한 가지는 몰입이다. 아, 몰입은 끝이 보이지 않는 창조의 원천이다. 자연스러운 몰입은 인위적인 조작이나 정교보다 감동적이다. 그 몰입은 ‘자기됨’self-becoming의 가감이 없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시는 눈문이나 토론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경쟁이 아니다. 시는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세상, 주위,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운이 좋은가를 스스로 깨닫는 유일한 문이다. 시인은 그 문간에서 주저하며,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그 비싼 샌달을 과감하게 벗어야한다. 그래야 신이 영감을 선사한다. 시인은 그 문간에서 서성거린다. 그리고 시는,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관조하고 감사할 거리를 찾도록 격려하는 침묵이다. 시인이 시를 통해 마련한 침묵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요일 수업에서, 아이들이, 이 시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 감사할 이유를 찾는 문간을 마련해 주고 싶고,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횃대에 올라 새벽을 알리는 수탉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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