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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31.(火曜日) “PSTD”

2023.10.31.(火曜日) “PSTD”

오늘 새벽에 여느 때보다 더 깊이 야산으로 들어갔다. 나는 샤갈과 벨라는 꼭 리드중에 잡고 간다. 이들은 샤냥개 본능을 간직하고 있어 갑자기 등장하는 멧돼지, 고라니, 혹은 높다란 잣나무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거꾸로 달려 내려오는 청설모가 등장하면 바로 돌진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돌아오려면 1시간 정도는 걸린다. 반면에 예쁜이는 항상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주변에서 맴돈다. 나는 아침 산책에서 예쁜이 리드줄은 놓는다.

우리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야산으로 올르시 시작하였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숲은 공포와 전률의 공간이다. 인적이 드물어, 이곳은 더욱 그렇다. 예쁜이가 저 아래에서 우리를 쳐다본다. 더 이상 올라오지 않겠다고 말한다. 후각을 통해, 오래전에 우리 앞에 등장하여 화들짝 놀랜, 담비같은 야생동물의 냄새를 알아차렸는지 모른다.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6년 전에 설악면 후미진 곳에서 온몸에 진물을 흘리며, 스치로폼을 뜯어먹고 있는 예쁜이를 발견할 때과 같다. 예쁜이에게 엄청난 트로마가 있었던 같다. 내가 예쁜이에게 목줄을 채우기까지 4년이 걸렸다. 아내는 아직도 예쁜이를 목욕시킬 때, 입질을 대비해야한다.

트로마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관심, 공감, 사랑으로만 치유되기 때문이다. 완전한 치유도 없다. 그 고통을 망각하고 치유를 게을리하면, 트로마가 다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트로마를 겼었다. 참사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반드시 시달린다. 시간이 지나도 먼 장소로 이주했어도, 그 경험은 엄청난 괴물이 등장하여, 그를 지배한다. PSTD (post-traumatic syndrome disorder)를 충분히 치유하려고 수고하지 않는다면, 그 괴물이 점점 커져,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더 이상 치유가 불가능한 암 덩어리가 되어, 그 개인이나 집단을 구제 불능상태로 만들 것이다.

인류는 지금 PSTD란 병에 단단히 걸려있다. 그 정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근거가 불분명한 코로나라는 병원체가 인류를 볼모로 잡아 병들게 하였다. 이 병원체로 7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염병이 가시기도 전에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일어났고 지금은 가자지구에서 한달 째 625전쟁과 같이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인간이 고안한 드론으로, 실시간 영상이 우리의 뇌에 진입한다. 인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정신병에 걸리고 있다. 전쟁엔 승자가 없고 누구나 패배자다.

참사를 통해 뇌에 각인된 이미지는 영원히 간직된다. 인간에겐 컴퓨터 슈퍼디스크나 클라우드보다 더 정교하고 찾기 힘든 미로와 같은 기억記憶을 가지고 있다.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이며, 개인이 부분으로 존재하는 가족, 친족, 민족, 국가, 인류의 삶과 정체성을 지배한다. 인류는 개인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만들고, 공동체가 남이 아니라 자기-자신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특별한 의식을 통해 ‘기억’한다. 기억의 반대인 ‘망각’은 무존재이고 죽음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은 그가 기억하는 세계다. 심리학자 융의 분석에 의하면, 기억은 그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하는 의식이 있고, 자신도 알지 못해, 위급한 순간이나 꿈에 가끔 등장하는 개인 무의식이 있다. 혹은 자신도 모르는, 개인 무의식보다 더 깊은 집단 무의식이 존재한다.

의식은, 한 사람의 지적인 능력과 건강상태로 좌우된다. 나이가 들면, 대개 친구 이름이나 최근에 일어난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21세기 최고의 문명의 이기인 핸드폰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들 중 전화번호를 5개 이상 외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전에는 천자문도 외우고, 한시니 영시도 외우는 고조선사람들이 있었다. 우리가 애지중지 손에든 핸드폰과 영상은, 우리는 궁극적으로 원하지 않지만, IT 괴물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서서히 그들의 종으로 만들고 있다. 이들의 의도와는 달리, 의식이 있는 개인, 자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위대한 개인을 만들고자, 부담스러운 긴 문장과 이야기로 매일묵상 글을 4년 전부터 써왔다.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생각 산책을 감행하면 좋겠다.

개인이 어떤 사건을 기억에 담기는 버겁고 엄청나,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 ‘망각’이라는 비밀 상자에 감춘다. 그 망각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휴면상태도 진입한 괴물로, 언제고 심신이 약해지거나, 괴로울 때, 다시 튀어나와 그를 장악할 것이다. 한 사람은 그 사람의 일상행동으로 어떤 인간인가를 알 수 있고, 위급한 상황에 하는 행동으로, 그 사람을 진가를 가름할 수 있다. 개인무의식은 사실 그 사람의 개성을 규정하는 원칙이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의 망각이라는 무의식으로 진입하려는 시도가 깨짐이고 깨우침이다. 개인은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개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

집단무의식은, 더 교묘하여 파악하기 힘들다. 한참 지난 후에나 등장하는 인간의 개성이며, 한 공동체의 도덕이고 한 민족의 민족성이다. 민족은, 그 민족이 좋아하는 것, 그 민족이 모두 공유하고 부르는 노래나 시에서 찾을 수 있다. 아리랑과 같은 노래는 우리 민족의 유전자를 지닌 음률이고 훈민정음, 신이 우리민족에게만 선물해 준, 최선의 모습이자 천재성이다. 우리 민족은 지정학적 위치로, 수천년동안 외세의 폭력적인 침공을 견뎌다. 최근에는 625라는 참상을 경험하여, 우리 무의식 속에 살아 있다.

이태원참사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기억을 애써 망각이란 상자에 가두려 한다. 좀비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도저히 문명사회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참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나 159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는데, 우리 사회는 무심하다. 우리의 모습은 세월호를 급히 빠져나오는 선장이다. 이 사건을 이해하고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것이,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통과의례일 수 있디. 우리는 너무 급해 옷을 입을 시간도 없이 기울어진 선박에서 아이들을 놔두고 도망친 선장처럼, 우리는 이태원참사를 모든 미디어에서 덮으려 한다. 이 참사에 대한 기억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의식,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 속에 남아있다. 이것을 치유할 방법은, 그 아픔과 마주하여, 하나하나 세세히 알아내고 우리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는 행위가 치유의 시작이다. 이 참사의 아픔은 이미, 우리가 기억에서 밀쳐내려고 일년동안 애쓴 그 고집스럽고 단단한 껍질을 부수는 행위다. 아픔과 직면하고 치유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우리를 한 화합하는 공동체로 만들 것이다. 외면하면 적이 되지만, 직면하면 친구가 되고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슬퍼하고 치유할 적절한 시간이다. 지금은 유가족들, 일반시민들, 정신과 의사들, 심리학자들, 종교인들이 함께 모여, PSTD를 치유할 시간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 우리 모두를 위해 정교한 치유프로그램을 만들어 미디어를 통해 온 국민이 자신을 돌아보아야할 시간이다. 이를 통해,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민족, 벼랑 끝이 줄 모르고 달리는 우리, 비참한 현실을 망각하려 먹고 마시고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을 관음하는 우리, 물질이라는 먹잇감을 물려고 돌진한 짐승이 된 우리를 가만히 응시할 시간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위정자들이 주도하여 이일을 실행해야 한다. 그들에겐 재난안전법 통과가 만사형통이라고 여기나, 그것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희생자들과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공감을 선물해주어야 한다. 가계부채가 늘어가 외환 위기 때보다 더 혹독한 시절을 견뎌야 할 우리가, 지금 필요한 것이 치유과정이다. 이를 통해, 잃어버렸던 우리 민족의 긍지와 끈기를 되살리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면 좋겠다.

사진

<저 아래서 우리를 쳐다 보는 예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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