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5.(水曜日) “방석方席”
오늘 오후 2시부터 에수회센터에서 <소명, 헌신, 각성>의 8번째 강의를 진행하였다. 센터에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집에서 적어도 3시간 전에 나서야 한다. 거리가 80km다.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까지 필요하다. 다행히 에 구입한 전기자동차로 서울미팅에 무담이 없이 갈 수 있다. 강연이 있는 수요일은 아침은 몸도 마음, 모두 바쁘다. 새벽 방석에 올라가 오늘 해야 할 임무와 의무를 곡씹어 본다.
일어나자마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물 한 모금 마시고, 방석方席에 올라가야, 오늘, 그나마 실수를 덜 저지른다. 아내가 12년 전, 시골로 이사 오면서 하얀 방석을 선물해주었다. 이 방석은 나에게 엘리야를 승천시켰다는 ‘메르카바’merqabah라고 불리는 마차이며, 로마 황제들이 올라탔다는,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콰드리가’quadriga이며, 무함마드를 등에 싣고 하룻밤에 예루살렘과 삼천층까지 단숨에 달려왔다는 백마 ‘부룩’buruq이다.
자신을 심오하게 관찰하는 묵상이 없이, 새벽이 가져오는 하루는 노동勞動으로 가득 차 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피곤이지만 즐거움이 될 수 있다. 노동은 묵상을 통해, 인생이란 무대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任務가 되고, 그 임무를 자신의 운명으로 수용하여 영혼까지 기꺼이 바치는 의무義務가 된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의무가 되기 위해, 어제의 나(我)를 희생양(羊)으로 바치고, 새로운 나로, 자신이 정한 목적지를 위해, 이 순간을 영원한 지금으로 바꿀 수 있다.
오늘 강의 내용은 ‘야곱의 각성’이란 제목으로 세 번째 시간이다. 나는 지난주 <창세기> 32장에 등장하는 소위 ‘야곱의 씨름’장면을 반만 소개하였다. 32장 1-22절은 야곱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반추하면서,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있는 응어리를 풀기 위해, 형 에서를 만나야 한다. 야곱은 20년 전, 어머니 리브가와 짜,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의 장자권한(히. 버코라)을 훔쳐 달아났다. 그는 삼촌 라반에게 가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재산일 불어나자, 라반과 분쟁을 일으켰다. 그는 마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탕자’처럼, 이제 형 에서를 만날 것이다.
야곱은 여전히 자신의 이름답게 ‘발뒤꿈치’였다. 자신이 형을 만나기 전에, 많은 선물을 종들과 함께 보내며, 형의 분노가 삭아지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종, 야곱이 뒤따라 오십니다”라는 말을 전하라고 시켰다. 야곱은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 첩, 그 자녀들까지 ‘얍복’이라 불리는 나루를 건내 보냈다. 그는 홀로 나루 이편에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다. <창세기> 32장 24절은 야곱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야곱이 홀로 남았다. 한 사람이 그와 여명이 틀 때까지 씨름하였다.”
여기에 등장한 ‘한 사람’은 누구인가? 광야 한가운데, 한 밤에 누가 나타날 일이 없다. ‘한 사람’(히. 이쉬)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야곱은 이제 마주하기 싫은 괴물과 마주해야 한다. 그 괴물은, 사실 만나기 거북한 형 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자신이다. 칠흑같은 밤이 추위와 함께 찾아왔다. 저 멀리서 늑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냇물은,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과 같았다. 이제 그는 아직도 에서의 장자권을 훔칠 때와 같은 현재의 자신과 직면할 시간이다. 인간은 홀로 자신을 오롯이 응시할 때, 새로운 자아를 만날 수 있다.
고독만이 오래된 인간을 유기시켜,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 그때 한 사람이 등장한다. 이 사람은, 하느님이나 하느님이 보낸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다. 사막 한 가운데, 한 밤중에 다른 인간이 나타날 가능성은 없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야곱을 과거의 인간, 그 과거의 인간이 만들어 놓은 현재의 자신을 상징하는 제2의 자아다. 야곱이 얍복나루를 건너, 에서의 용서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에서를 속이던 과거의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구원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인간이, 원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용기에서 생긴다. 원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과거의 자신과 씨름하여 이기는 것이다. 인생은 각본대로 움직이는 연극이 아니라, 오히려 예상할 수 없는 공격이 들어오는 레슬링 시합이다. 상대방은 항상 그 대상의 취약점을 찾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 마련이다. 야곱은, 강을 건너야 하는 시점인 새벽이 오기 전에, 자신과 싸워 이겨야 한다. 자신을 극복해야, 자신이 되고 싶은 초인이 될 수 있다. 야곱은,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붙들고 목숨을 바친다. 25절은 다음과 같다:
“그(그 사람)가 그(야곱)를 이기지 못하자, 그(야곱)의 넓적다리의 움푹 파인 곳을 내리쳤다. 그(야곱)이 그(그 사람)과 씨름하는 동안, 넓적다리의 움푹 파인 곳이 탈구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가 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선수다. 야곱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기 때문에, 상대가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그를 이길 수 없다. 그 낯선 자는 야곱의 간절함에 놀랐고 그를 이길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야곱의 하체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찾아 공격하였다. 올림픽 결승전에 나간 선수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집중하는 부분이 있다. 상대방의 신체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그 사람은 야곱 넓적다리의 움푹 파인 곳을 집중공격한다.
우리가 자신에게 가장 취약한 곳, 가장 숨기고 싶은 진실과 대면하여 극복하지 않는 한, 진정한 혁신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생에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은, 그것을 훌륭하게 대처하는 사람에겐, 오히려 승리과 희열이 된다. 이 낯선 자가 당연히, 그리고 고맙게도 야곱의 취약한 곳을 내리쳤다. 다리를 내리쳤다는 것은, 홀로 스스로 걷지 못하도록, 자립하지 못하도록, 그의 전부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야곱은 낯선 자와 씨름하는 동안, 그곳이 골절되었다. 골절되어 다리를 절뚝거려도, 과거의 자신을 극복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이 낯선 자는 야곱에게 자신을 놓아달라고 26절에 애원한다:
“그러자 그(그 사람)가 말했다. “나를 놓아주어라. 왜냐하면, 여명이 트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곱)가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강복하지 않는 한, 내가 당신을 결코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그 낯선 자가 말한다. 야곱을 변모시킬 궁극의 친구이자 적인 낯선 자는 야곱이 혼자 있을 때 찾아와 그를 시험한다. 아침이 되어, 해가 뜨면, 그는 자기 변모의 결정적인 시간인 밤이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낮이 되면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 식구, 친척, 부족, 백성의 일원이 되어 생존해야 한다.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야곱이 낯선 자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낯선 자를 잡고 무엇을 요구하였는가? 그가 요구한 것은 ‘강복康福’이다. ‘강복’이란 히브리 단어는 ‘버러카’다. ‘버러카’는 ‘무릎’이다. ‘강복’과 ‘무릎’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인간에게 복이란, 자신에 주어진 임무와 의무를 알고, 그것에 무릎을 꿇고 온전하게 순명하는 삶이다. 야곱은 이제 원래의 자아와 조우하여, 신과 자연의 섭리에 순명하게 되었다.
낯선자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자신에게 맡겨진 유일한 의무, 몫을 회복하려는 야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야곱)가 말했다. “야곱입니다.”
낯선 자는 야곱의 패기와 결기를 보고, 그에게 자신이 되어야 할 인물에 알맞은 이름을 지어 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야곱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이름을 짓는 행위는 창조행위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말은 “너는 누구냐?”라는 말이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 “저는 발뒤꿈치입니다.”
이 질문은 <창세기> 28장에 등장하는 이삭의 질문과 유사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삭은 에서로 변장하기 위해 동물 털을 입고, 장자권을 수여하기 위해 들어온 야곱에게 ‘너는 누구냐?’(히, 미 앗타)라고 질문하였다. ‘너는 누구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보려는 일반적인 질문이지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히. 마 셔막)은 인생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만한 삶의 의미를 찾았는가란 질문이다. 과거 이삭의 질문에 야곱은 자신을 속인다. “저는 당신의 맏아들, 에서입니다”라고 말한다. 재물과 장자권에 눈이 어두워, 자신을 야곱이 아닌 에서라고 대답하였다. 이러나, 낯선 자의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야곱은 간단명료하게 ‘야곱!’이라고 말한다. 야곱은 스스로 자신을 ‘남을 속이는 일을 일삼는 사기꾼 야곱’이라고 고백하였다. 야곱이 자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며 자신의 정체성인 ‘야곱’을 고백하자 기적이 일어나다. 낯선 자는 자신을 극복한 야곱의 이름을 바꿔준다.
“그(그 사람)가 말했다. “너의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왜냐하면, 네가 하느님과 사람과 씨름하여 이겼기 때문이다.”
야곱은 자신을 극복한 자가 되었다. 낯선자를 그런 야곱에게 ‘신과 사람과 씨름하여 이긴 자’란 이름, 즉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과거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극복한 자는 누구나 이스라엘이다. 이 하얀 방석은 어제의 나를 직시하고 회개하고 극복하게 만들어줘, 오늘 신과 싸워 이기라고 응원한다. 나의 간절한 염원을 아는 이 남루한 방석은 언제나 나를 승천시킨다.
사진
<나의 부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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