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4.(火曜日) “안”
어제 결심決心한대로, 뒷마당으로 이어진 야산野山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지난 여름, 수풀로 우거진 야산을 오르다 보면 이웃집 반려견들이 짖었었다. 올해 이 이웃들의 반려견들이 무지개를 건너갔다. 한 이웃은 나이든 반려견의 마지막을 위해, 가평에서 차를 몰고 인천에 있는 한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아왔다. 나는 종종 다른 이웃의 개도 보았다. 우리가 밤 산책에서 돌아올 때, 보았다. 저 높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달이 유일한 가로등인 어두운 거리에서, 이 이웃 노부부가 유모차에 노견을 실고 산책을 다녀오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아, 반려견들의 유일한 단점은 일찍 죽는다는 사실이다. 별 의미 없이 이기적으로 사는 인간이란 동물이 개보다 수명이 5배라니, 조물주의 실수가 틀림없다. ‘개같다’는 표현은 분명 극존칭이다.
오늘 오랜만에 뒷마당 야산 산책에, 이웃 개들이 짖는 열렬한 환호 소리가 없으니 허전했다. 한편으론 안심이다. 자신의 명을 다했으니 견주나 반려견들이나 지금은 모두 평안할 것이다. 한편으론, 우리의 아침 산책이 이들의 잠을 설치지 않게 만들 수 있으니 다행이다. 4개월 만에 들어선 산이라 고라니 길 여러 곳이 넘어진 나무로 막혀있다. 수십년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키던 나무도, 시간이 되면, 자연에 순응하여, 자신이 왔던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 끝까지 꼿꼿이 버티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추하다.
아직도 정글과 같은 수풀과 넘어진 나무를 넘어 고라니가 오래전에 만들어준 비탈길로 올라갔다. 11살이나 된 샤갈과 벨라가, 이곳에 오면 자신도 모르는 내면의 힘이 생겨, 마치 날렵한 족제비같이 뛰어 오른다. 예쁜이는 항상 뒤에서 다른 동물들이 남겨놓은 온갖 흔적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어떤 동물이, 언제, 왜 왔는지 헤아린다.
야산 능선에 올랐다. 왼쪽으로 1km정도이고 오른쪽으로 700m정도다. 이 갈림길에서 샤갈이 말한다. 오랜만에 올랐으니, 오른쪽으로 가자고 내가 잡은 리드줄을 당긴다. 우리는 모두 오른쪽 능선을 따라 빠르게 내려갔다. 그런 후, 제법 평평한 길이 나오면 달렸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능선에 셀 수 없는 밤송이가 널려있다. 아, 이 밤송이들은 저 하늘 높은 곳에 달려있었던. 보석이 아니었나! 그들은 저렇게 숭고하게 살다가, 과감하게 스스로 하강하여, 흙으로 돌아간 준비 중이다. 자신을 보호하던, 그 날카로운 가시를 해제하고 온몸을 벌려, 기꺼이 밤송이들을 이 야산의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스스로 옅은 고동색으로 변신하고 있다.
밤송이는 만물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현자다. 그렇게 땅에 누워, 다람쥐나 고라니의 먹이가 되던지, 아니면 그대로 한참 누워있는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수용한다. 그런 후, 가만히 나무 아래에서 거룩하게 썩는다. 자신이 썩어야, 자신과 같은 밤을 생성하기 위한 자양분이 만들 수 있다. 죽어야 산다는 예수의 깨달음을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실천한다. 썩어 죽어야, 내년 적당한 시절에 저 높은 가지 위에서 다시 팔랑거릴 수 있다. 솔방울은 우리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알려 준다.
자기 주변에 떨어져, 부활을 꿈꾸는 밤송이의 심정은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의 내면철학과 유사하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손과 힘이 닿을 수 있는 곳, 예들 들어, 자신의 책상, 자신의 방, 자신의 마음을 발굴하라고 조언한다.
Ἔνδον σκάπτε ἔνδον ἡ πηγὴ τοῦ ἀγαθοῦ
καὶ ἀεὶ ἀναβλύειν δυναμένη, ἐὰν ἀεὶ σκάπτῃς
“안을 발굴하십시오. 그 안에 당신이 삶에서 찾을 수 있는 최선이란 샘물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계속 발굴하신다면, 당신을 최선을 지속적으로 퍼 올릴수 있습니다.”
<명상록> VII.59.
아우렐리우스는 ‘안’이란 의미의 그리스단어 ‘엔돈ἔνδον’을 두 번이나 사용하였다. ‘엔돈’는 ‘-에서’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엔’과 ‘집안에 있는 물건들’이란 의미의 ‘돈’의 합성어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 안에서’라는 의미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위드인’within이다. ‘위드인’은 ‘-에서’라는 의미의 in과 다르다. ‘위드인’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응시하고, 그 안에서 안주하고 만족하는 유유자적이다. 첫 문장은 ‘당신의 내면을 발굴하십시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그 안에서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최선이 샘물처럼 용솟음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없는 ‘위드아웃’without을 추구한다. 위드아웃은 원래 없던 것들이다.
최선이 내 안에 있다면, 내가 해야 할 의무義務는 무엇인가? 그 의무는 끊임없이 인내하며 내 안을 발굴하는 의연이다. 세상에 물건들은 한정적이지만, 내 안에서 발굴될 선은 샘물처럼 무한하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유일한 노력이다. 사람들은 행복과 환희를 가져다줄 궁극의 보물이, 밖에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 것은 술이나 마약처럼 잠시 행복하게 만들지만, 곧 우리를 중독시켜 소멸의 미로에서 헤매게 만든다. 요즘 미디어는 보는 먹고 마시는 것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바울 사도는 먹과 마시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οὐ γάρ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βρῶσις καὶ πόσις,
ἀλλὰ δικαιοσύνη καὶ εἰρήνη καὶ χαρὰ 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하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구별된 영혼靈魂에서 발굴되는 의로움, 평온함, 기쁨에 있습니다.”
<로마서> XIV.17
야산 산책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행복하게 만든다. 반려견들의 온몸에 도깨비바늘이 붙어 있다. 헐떡거리는 이들을 위해 얼음을 넣은 냉수를 주었다. 게걸스럽게 마시지만, 아침에 해아할 운동을 마쳐 행복하다. 사료를 대령하니, 세 마리 전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먹어치웠다.
나는 뒷마당 데크에 쌓인 낙엽을 쓸었다. 낙엽 쓸기는 나를 집중시킨다. 내 눈은 데크 구석에 낀 낙엽을 발견하도록 훈련되었다. 내가 낙엽을 20분정도 쓸었나! 그러다 그 안에서 오늘 내가 써야 할 산책일기 주제가 떠올랐다. 그것이 아우렐리우스의 ‘엔돈’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일상, 주변, 안에서 선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
<뒷산 나무들과 산책중인 반려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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