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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4.(水曜日) “꿈”

2023.10.04.(水曜日) “꿈”

오늘 서강대 예수회센터에서 ‘야곱의 꿈’이란 주제로 다섯 번째 강의를 했다. 이번 강의 시리즈의 주제가 ‘소명, 헌신, 각성’이다. 나는 아브라함을 소명의 화신, 이삭을 헌신의 상징, 그리고 야곱을 각성의 구루로 해석하였다. 지금부터 3000년이상된 이야기이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심금을 울린다. 보통이야기는 금방 잊히지만, 위대한 이야기는, 삶의 용기를 주고, 숭고한 이야기는, 독자를 다시 태어나게 다. 이 족장들의 이야기는, 숭고한 이야기로, 미래에도 여전히 감동을 줄 수 있는 아방가르드다.

이 이야기들은 겉은 세련된 것 같지만, 속은 허무하고 썩어 들아가는 대한민국의 소멸문화에 생기를 불어넣을 산소통이다. 희망은 보이지 않지만, 내가 생존해야하는 이유를 알려 준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지닌 최초의 여성 판도라가, 상자에 마지막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보관한 것이 바로 희망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희망’을 엘피스elpis라고 불렀다. 엘피스는 들판에 핀 꽃처럼, 자연의 섭리로, 어디에선가 날라온 씨앗이 보기에 좋고 향기가 나는 꽃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우리가 눈을 돌리면,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동식물들은,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환경을 극복하고 피어난 예술 작품들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희망’을 스페스spēs라고 불렀는데,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로마인들에게 희망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막과 광야에서 희망을 일구어야 했던 히브리인들은 희망을 ‘티끄와’tiqwa라고 불렀다. ‘티끄와’는 ‘우연이 일어난 것’, 영어로 표현하지만 happen이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우연’은 필연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로서의 우연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경주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연연해하지 않는 여융다. 그런 의미에서 티끄와는 한자 희망希望과 일맥상통한다. 달이 점점 작아져 초승달이 되고, 이제 소멸할 상황이 되었을 때, 그 상황에 온전하게 임하여, 보름달을 희구하는 단계다. 그러니 가장 낮은 단계가 견고한 바닥이 되어, 우리를 견인할 수 있는 단단한 동앗줄이다.

<창세기> 28장은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희망은 도저히 희망을 기대할 수 없을 때, 그 절망을 부둥켜 안고 씨름할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는 샛별이다. 스무 살 야곱의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였다. 그는 어머니 리브가와 짜고 아버지 이삭의 유산을 탈취하여 도망치고 있었다. 야곱의 형, 에서는 당연하게 자신에게 올 장자권 유산을 동생에게 빼앗긴 사실을 알고 그를 추적한다.

야곱은 친척들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가던 중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서 하루 밤을 지낸다. 베게도 없어 넓적한 돌 하나를 주워 베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막의 밤이 가져다주는 추위와 정막,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가져다주는 불안과 공포가 그를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야곱은 인생의 맨 밑바닥에 떨어진 자신을 응시하기 시작한다. 어머니 리브가는 이삭의 물질적이며 정신적인 유산은,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냥꾼 에서가 아니라, 내면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야곱이 남편 이삭의 유산을 받아야한다고 일찍이 판단하였다. 이삭도 야곱을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을 것이다.

야곱은 쫓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막 한가운데서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돌배게 배어 스치는 바람이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그 우울하고 어두운 절망의 순간은 자기변신을 위한 최적의 기회다. 그는 수많은 별들로 수 놓아진 저 높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 멀리서 희미하게 자신의 ‘별’을 발견한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야곱은 처음으로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벗어나 혹독한 자기검증의 공간이 '사막'에 던져졌다. 사막은 식물과 동물이 거의 생존하지 못하는 버려진 땅이다. 그러기에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는 공간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막을 ‘미드바르(midbar)’라고 했다. '바람이 오랜 기간 동안 다져놓은(dabar) 장소(mi)'라는 뜻이다. 사막은 자신을 유혹하는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자신을 저 하늘에서 발견한 별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게 만드는 천상의 공간이다. 인간은 그런 곳에서 꿈을 꾼다. 허황된 미래가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실현가능한 미래의 로드맵이다.

야곱은 이 무명의 장소에서 꿈을 꾼다. 자신이 흠모하는 자신과 조우하는 시간이며, 삶의 문법을 깨닫는 시간이다. 야곱은 이 고통을 통해 그런 꿈을 볼 수 있는 정신적인 눈을 가졌고, 이 꿈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이를 기억해 삶의 기준으로 삼고자 결심한다. 야곱이란 이름을 가진 사기꾼이 형의 모든 재산을 가로챈 후, 도망치고 있다. ‘야곱’Jacob이란 히브리 단어의 축자적인 의미는 ‘발뒤꿈치’란 의미다. 그 의미를 풀어 설명하자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위에 있는 자를 항상 속이는 자’란 뜻이다. 쌍둥이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나, 한 번도 형을 능가한 적이 없는 인생 실패자다. 그런 그가 사막 한 가운데서 꿈을 꾼다. 꿈을 꿀 수 없는 최악의 시간과 장소에서 감히 꿈을 꾼다. <창세기> 28.10-12a은 이렇게 시작한다:

10. וַיֵּצֵ֥א יַעֲקֹ֖ב מִבְּאֵ֣ר שָׁ֑בַע וַיֵּ֖לֶךְ חָרָֽנָה׃

야곱에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걸었다.

11. וַיִּפְגַּ֨ע בַּמָּקֹ֜ום וַיָּ֤לֶן שָׁם֙ כִּי־בָ֣א הַשֶּׁ֔מֶשׁ וַיִּקַּח֙ מֵאַבְנֵ֣י הַמָּקֹ֔ום וַיָּ֖שֶׂם מְרַֽאֲשֹׁתָ֑יו וַיִּשְׁכַּ֖ב בַּמָּקֹ֥ום הַהֽוּא׃

‘그가 그 곳(마콤)에 이르렀을 때, 해가 이미 저물어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그가 그 곳(마콤)의 돌들 가운데 몇 개를 취하여 그것을 머리밑에 두어, 그 곳(마콤)에서 잠들었다.”

12a. 그리고 그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보았다.

וַֽיַּחֲלֹ֗ם וְהִנֵּ֤ה

야곱은 그를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형을 피해, 친척이 있는 하란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는 몇 달을 걸어야 하란에 도착할 수 있다. 야곱은 열흘정도 사력을 다해 걸었다. 그는 사막 가운데 한 장소에 도착한다. 지명도 없고 인적도 없는 장소다. 도망자의 신세로 인적이 끊긴 한적한 곳에 이르렀다.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없어, 사막 한가운데, 드러누웠다. 멀리서 들여오는 늑대의 울음소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비참한 신세보다 오히려 들짐승의 먹잇감이 되 편이 낫다고 체념하였다.

11절에 구약성서 전체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 등장한다. 한 단어가 한 문장에서 세 번 반복한다. 그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마콤’이다. ‘마콤’은 ‘장소; 곳’이란 의미다. 야곱은 ‘그 곳’에 도착한다. 그 곳은 사막의 한 장소로 아무런 표시가 없는, 다시 말하자면, ‘아무 장소도 아닌 장소’다. 그는 ‘그 곳’에 이르렀을 때, 이미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 더 이상 이동할 수 없었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과 달만 그의 초라한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야곱은 그를 응시하는 별과 달을 보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도망자인가, 아니면,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사막을 건너가는 경계인인가?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형 에서와 재산싸움이나 하다 인생을 마칠 그런 졸장부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눈 안으로 쏟아지는 별 밑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물었다. 그는 브엘세바에서 이삭과 레베카의 아들이고, 에서의 동생이었다.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이며, 누구의 동생이었다. 그러나 사막에서 그는 자신을 정의定義해야했다. 그는 대장부로 스스로를 새로운 언어로 정의한다.

야곱이 주위를 돌아보니, 베개로 삼을 만한 돌들이 보였다. 그는 그 곳, 즉 사막에 있는 무명의 돌들 몇 개를 취해 머리 밑에 두었다. 이곳의 돌은, 야곱의 머리와 심장을 기꺼이 맡길 수 있는 구별될 돌이었다. 그 돌은 우주가 시작되던 그 날에, 독수리가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거룩한 한 장소를 찾던 중 발견했다는 델피 신전의 돌이며, 그 돌은 오래전 사우디아라비아에 떨어졌다는 검은 돌 카바이며, 그 돌은 후에 예루살렘이 그 위에 건축될 커다단 바위다. 야곱은 그 돌을 머리 밑에 두고, 그 곳에서 잠들었다.

여기서 잠이란 졸려서 눈이 감기로, 오감의 감각이 정지되는 그런 잠이 아니라, 오히려 오감이 예민해 질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응시할 수 있는 각성의 상태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새로운 시작은 항상 이 각성의 의례인 잠을 통해 시작했다. 야곱은 잠을 통해 꿈을 ‘보았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본 것이다. 야곱은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환상을 보았다. 꿈에 사다리가 등장하였다. 그 사다리는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저 높은 하늘에 그 끝을 걸어놓았다, 하늘과 땅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사다리를 통해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인 합일合一을 보았다.

인생에서 희망이 고갈된 상태, 희망을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절망은 희망이란 싹을 틔우는 최적의 시간이다. 그는 사막에서 ‘층계’라는 희망을 본 것이다.

사진

<야산 밤나무 아래 자리를 잡은 동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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