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일산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아버님은 31년생으로, 92세가 되셨고 어머니는 36년생으로 87세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 625, 60년대와 70년대 산업화를 온몸으로 경험한 역사의 증인이자 삶의 증언자다. 일산가기는 나에게 헤매고 있을 때, 나의 뿌리를 확인하고 새 힘을 얻는 의례다. 일산은 나에게 시내산으로 삶의 십계명을 받는 장소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참전한 이유는, 그가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여 영원한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의 부하이자 신복인 오딧세우스가 자신의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 새로운 문명을 구축하기 위해서다. 종종 부모님을 찾았지만, 새해 첫날은, 특별하다. 그 향수鄕愁에 이끌려 나는 일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오딧세우스의 귀향을 그리스어로 ‘노스토스’nostos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귀향歸鄕을 넘어, 자신의 뿌리를 다시 확인하는 귀근歸根이며,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도 돌아가는 회개悔改다. 회개는 종교에서 정한 교리나 계명을 어겨, 신에게 용서를 비는 비겁이 아니라,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확인하는 용기다.
아버님은 언제나 힘이 넘치신다. 얼굴에 주름은 많아졌고 치아도 상하셨지만, 눈은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걸음걸이는 씩씩하다. 나보고 잘 좀 걸으라고 야단치신다. 아버님은, 그 자체가 희망希望이다. 아직도 그의 눈은 625때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세 번이나 포로로 잡혔으나 생존하신 불굴의 힘을 발산한다. 어머님은 언제나 사랑이 넘친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기뻐하고 좋아하신다. 인도에서 말하는 ‘자비慈悲’를 일생 실천하시는 분이다. 자慈는 타인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이며, 비悲는 타인의 슬픔은 자신의 슬픔으로 여길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이자, 그 사람이 더 이상 불행을 겪지 않도록 실제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수고다. 자비는 소극적인 망상이나,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에게만 베푸는 이기심이 아니라, 낯선 자에서 펼쳐야 하는 인간의 됨됨이이며 종교와 철학의 궁극적인 지점이다.
일생 종교에 헌신하신 아버님은, 한국종교, 특히 기독교가 허물어 가는 모습에 가슴 아퍼 하셨다. 50-60년대, 보릿고개를 건너는 한국인들에겐 사후세계 천국이나 축복을 주제로 한 강론이 타당했고 70-80년대는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독재와 반칙이 남무하는 한국사회를 질책하는 설교가 옳았다. 종교는 시대 상황에 따라 사람들의 삶을 승화시켜주는 주제를 선정하여, 시대의 예술가가 되어 말로 전파해야 한다. 90년대 이후, 정보화시대 들어와 우리, 아니 전 세계는 모두 인터넷과 sns의 위력으로 동일한 문화를 강요받고 세뇌되었다. 그 정신병적인 증상이 가장 잘 드러난 장소가 대한민국이다. 저출산율 세계1위, 삶의 목적이 돈인 나라, 명품이 가장 잘 많이 팔리는 시장, 오징어 게임과 같은 영화를 잘 만들 수 밖에 없는 나라, 교육을 국가 경제를 위한 소모품이나 도구로 여기는 어른들, 그리고 정치인들의 어쳐 구니가 없는 말을 하루 종일 미디어를 통해 듣고 듣고 또 들어, 어느덧 중독되어, 한 쪽짜리 사고를 지녀, 다른 한쪽을 미워하고 제거하기 위해 분노하는 나라. 이 시대의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은 그 화두를 잃었다.
요즘 아버님의 기도는 새벽운동이다. 지난 2016년 12월, 병원으로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재활 훈련을 하지 않으면, 척추가 망가질 수 밖게 없다는 선고를 들으셨다. 의사는 그 이전에 두 번의 심장조형수술과 대장수술을 받으셔서, 이제는 다른 도리가 없고 휠체어를 탈 수 밖에 없다고 그에게 경고를 주었다. 아버님에게는 재활치료는 일종에 그의 삶에 대한 모독이었다. 치료받기 위해, 병원에 정기적으로 간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일제와 625를 겪었는데, 자신이 이제 스스로 몸을 치유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병원에서 조제한 약을 꼬박꼬박 종교적으로 섭취하시면서, 재활운동치료 대신, 자발치료를 선택하셨다.
그는 걷기가 재활에 좋을 것이라고 판단하셨다. 새벽기도와 운동으로 일생을 수련하신 분이라, 그 유전자가 다시 작동한 것이다. 어버님은 2017.1.26., 지금부터 8년전 85세가 되시던 해에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하셨다. 그 결정의 시작이자 마지막은 새벽만보걷기였다. 내가 좋아하는 소로나 니체가, 자신들이 걸은 만큼, 생각하고 글을 썼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이후, 지난 6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눈이 오고 비가 오면, 더욱 힘을 내며 걸으셨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 아버님 책상 위에서 몰래 수첩을 보았다. 책상 위에 성경책, 매일 일기, 주별 요약 수첩, 그리고 월별 정리 수첩이 놓여있었다. 월별 정리수첩 위에 붉은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14476
8664
11213
11431
13539
12595
17498
14612
13005
11431
10318
11456
19543
10721 (12.14. 아아 몹시춥다. 집에서 성서연구)
16083
11527
15629
10833
15626
15335
10920 (12.21. 폭설로 천하가 아름답다)
15200
13459
14008
11455
19173
11749
11749
이것은 어버님의 2022년 12월, 그가 신에게 드린 새벽운동 걸음 숫자다. 그가 어떻게 하루는 사시는지 내 가슴속 깊이 저며온다. 나도 2023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걷고 싶다. 나의 새해결심은 반려견들과 야산에 매일 등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한가지 화두를 찾고 싶다.이 소원이 올해 이루어지면 좋겠다. 어버님 수첩을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 불효일 것 같지만, 나와 여러분의 새해결심을 위해 몰래 게재揭載한다.
사진
<아버님 2022년 12월 달력 수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