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2022.8.8. (火曜日, 269th) “너 자신을 위하여!”

2022.8.8. (火曜日, 269th) “너 자신을 위하여!”

한 과정을 마친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다시 하겠다는 약속이다. 지난 5월부터 10주동안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창세기 1-11장을 30여분들과 공부하였다. <창세기>보다 인류 문화와 문명에 심오한 기록이다. 유일신 종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소멸위기에 빠졌다. 신에 관한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시작했지만, 이 각각의 종교는 ‘교리’라는 이름으로 감동과 감각을 제거하고, 현대인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는 철이 지난 변론으로, 소멸을 자처해왔다.

그리스도교는, 5세기 멸정위기에 어거스틴이 등장하여, 원죄라는 교리로 멸절위기를 면했고, 11세기 아퀴나스를 통해, 정교한 철학체계로 변신하였다. 15세기에 마르틴 루터, 칼뱅, 쯔빙글리, 존 웨슬레와 같은 개혁가들을 통해, 하늘에 있던 그리스도교가 일상으로 내려왔다. 이 변신이 유럽근대국형성에 기반이 되었다. 19세기 말, 그리스도교는 다시 혁신의 물꼬를 맞이하였다. 이때 등장한 구원자는 찰스 다윈, 구스타브 카를 융, 니체,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지질학, 고고학, 문헌학의 찬란한 성과다.

찰스 다윈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유인원으로부터 진화한 동물이란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고, 프로이트와 융은, 인도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간은 의식이며, 그 의식은 무의식과 비교하여 빙상의 일부란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현대철학의 시대를 연 니체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동안 서양인들이 믿었던 그런 신는 죽었고, 유럽인들이 스스로 그런 신을 죽였다고 선포하였다. 그리스도교는 이들의 깨달음과, 과학적인 성과를 통해 스스로 변신해야했지만, 오히려 근본주의로 무장하여, 대중의 관심을 잃었다. 요즘 그리스도교는 자멸을 자초해오고 있다.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모래와 같은 교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

나는 새로운 시대를 열 돌격대avant garde로 인류기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이야기 창세기를 공부하였다. 이 수업을 통해 성서가 지닌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 그 해석으로부터 개혁의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었다. 오늘은 노아홍수나 바벨탑이야기로 마무리해 해야 하지만, 창세기 12장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소명이야기로 마무리하였다. 희망의 노래로 이 수업을 마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창세기 12장 1절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신이 아브람에게 느닷없이 던진 명령이다:

“너 자신을 위하여, 너는 고향, 친족, 집을 떠나라.

그리고 내가 앞으로 보여줄 땅으로 가라.”

아브람의 정체성을 그의 고향, 친족, 집이었다. 그러나 이제 75세가 된 아브람에게 이런 것들은 그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알이 아니라, 그를 감금시키는 알이 되었다. 아브람을 이제 더 이상, 과거 안에 스스로를 감금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버린 것이다.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두 단어는 ‘너 자신을 위해서’와 ‘앞으로 보여줄’이다. 한글이나 영어 성경에서는 ‘너 자신을 위해서’라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에 등장하는 ‘레크 르카’라는 문구는 ‘너 자신을 위해서’라고 번역해야 한다. 우리가 모두 이제,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이전에 안주하던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유목민에게 집, 친척, 고향을 그를 보호해주는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깨달음의 순간과 마주하면, 이런 안정장치게 그를 얽매는 감금장치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문장을 쓴 성서저자는 ‘레크 르카’라는 비밀 문구를 살며시 넣은 것이다.

위문장의 의미를 푸는 두 번째 단어는 두 번째 문장에 등장하는 ‘너에게 보여줄’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아르에카’로 영어로 번역하자면 ‘I will show you’다. 신은 그 목적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숭고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의 상태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결심이다.

지난 10주간동안 함께 자신의 삶의 아방가르드가 되기 위해 달려온 도반들에게 감사드린다. 이들과 함께 다시 9월에 매주 수요일 예수회센터에서 시작하는 ‘소명, 희생, 각성’ 수업에서 만나길 바란다.

사진

<아방가르드 도반들>




Commentaire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