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5. (金曜日) “혼동混同”<요가수트라 훈련품訓鍊品> 경구 17

2022.8.5. (金曜日) “혼동混同”

<요가수트라 훈련품訓鍊品> 경구 17

믿음이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지탱하는 반석이다. 그런 경험을 통하지 않는 소위 믿음이라는 것은 강요이며 억지다. 인류는 오랫동안, 세상을 움직이는 유일한 진리를 발견했다는 강령이나 교리를 통해 많은 피를 흘렸다. 믿음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하여, 그것을 목숨을 바쳐서라도 준수하려는 삶에 대한 태도다. ‘믿음’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빌리프’belief는 뒤에 따라오는 단어의 의미를 강조하는 강세형 접두어인 be와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lief의 합성어다. 믿음이란 자신이 정성스럽게 의도적으로 선택한 대상을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만의 믿음이나 사랑의 대상을 찾는 여정은, 그것이 타인이 보기에는 아무리 힘들고 어처구니없어 보여도, 거룩하고 행복하다. 그런 대상을 찾지 못하고, 사람들이 환호하는 허상인 대상을, 자기믿음의 대상으로 여기는 혼동混同이 고통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훈련품訓鍊品> 경구 17에서 인간의 삶을 불행스럽게 만드는 고통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द्रष्टृदृश्ययोः संयोगो हेयहेतुः

draṣṭṛ-dṛśyayoḥ saṁyogo heyahetuḥ

드라스트리-드리샤요흐 상요고 헤야헤투

(직역)

“피할 수 있는 것의 원인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한데 엮는 것이다.”

(의역)

“피할 수 있는 것, 즉 고통과 불행의 원인은 수련자가 발견해야 할 진정한 자아인 푸루샤와 수련자의 오감을 통해 인식되는 현상인 프라크리트를 혼동하여, 자신도 모르게 하나로 묶는 행위다.”

(어휘)

draṣṭṛ m.sg.nom ‘보는 사람; 진정한 자아; 푸루샤’ (<dṛś ‘보다’)

dṛśyayoḥ m.sg.loc. ‘보여지는 것; 현상; 프라크리트’

saṁyogo m.sg.nom. ‘일치; 연관; 혼동’ (<sam ‘함께’ + yoga ‘엮기’ (<yuj ‘엮다’))

heya n.sg.noom ‘피할 수 있는 것’

hetuh m.sg.nom ‘원인’

(해설)

이 문장에 등장하는 첫 단어인 ‘드라스트리’는 깨달음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발굴-발휘하는 푸루샤다. 푸루샤는 신이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똑같이 창조한 신인은 ‘하아담 카드몬’haAdam kadmon이며, 영주주의에서 말하는 앤쓰로포스Anthropos다. 현대 철학자 니체는 그런 존재를 오래된 자신을 극복한 초인인 위버멘쉬Übermensch라고 불렀고 초월주의 창시자 랄프 왈도 에머슨은 오버소울Oversoul라고 불렀다. 드라스트리는 외부가 아니라 수련자의 내부의 심연에 존재하는 ‘자기-자신’이라는 거룩한 불꽃이다.

파탄잘리는 경구 16행에서 미래고통을 피할 수 있고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경구에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산스크리트 단어 헤야heya는 ‘피할 수 있는 것’은 인생을 지옥으로 만드는 외부에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이다. 불교에서는 고통을 의미하는 단어로 ‘두카’duḥkha를 사용했지만, 파탄잘리는 ‘헤야’heya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헤야’는 ‘피할 수 있는 것’이란 의미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두카’로 구성되어있다고 가정하지만,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을 통해 그런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파탄잘리는 이제 ‘피할 수 있는 것’, 즉 ‘고통’의 원인을 수학자처럼 분석한다. 그가 제시한 분석은 간결하고 강력하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특히 눈을 통해 외부에 있는 정보를 내부로 들여와 분석한다. 그 고통은 질병과 같아,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제거할 때, 점차 그리고 온전히 사라진다. 겉으로 보이는 추상적인 증상에 집착한다면, 그 질병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는 지금 그 원인을 찾아나선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지 않는 환경인 ‘마야maya’에 던져진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태어나, 그 환경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그(녀)는 자신이 던져진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략을 ‘가족’이라는 신체를 부여한 공간과 ‘학교’라는 상식을 가르치는 공간에서 배운다. 이 배움은 우리 각자가 우연히 던져진 상황에서 소위 성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인간이, 그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살펴 가엽게 여기고, 자신이 의도적이며 신중하게 선택한 자기-자신을 조각하기 시작할 시점이 온다. 그러면, 그는 과거의 배움이 생떼이고 발버둥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외부를 향하던 눈길을 내부로 돌릴 때, 수련자는, 자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자신, 내부와 외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발견한다. 에머슨은 그런 눈을 ‘투명한 눈 알the transparent eyeball’이라고 불렀다. ‘투명한 눈알’은 외부의 겉모습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그 대상을 오랫동안 관찰하여, 숨겨진 핵심을 알아차리려는 현미경이자 망원경이다. 물론 이것들의 성능은 수련 정도에 따라 깊어지고 선명해진다.

드라스트리draṣṭṛ는 대상을 통해 얻어야 할 궁극의 정보를 얻기 위해 ‘깊이 보는 행위’ 혹은 그런 행위자를 의미한다. 플라톤의 용어를 빌리자면 ‘쎄오리아theoria’다. 그는 쎄오리아를 설명하기 위해 원형경기장에 모인 관객들의 다양한 관점을 비유로 든다. 첫 번째, 우선 경기에 참여한 선수의 관점이다. 그들은 상대방을 효율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경기를 진행한다. 산스크리트어 용어를 빌려 설명하자면, 경기가 ‘마야’maya이며, 자기중심적인 경기운영방식이 이기심(아스미타’asmita)이며 무식(아비트야’avidya)다. 두 번째, 관중의 시선이다. 관중은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나 팀을 응원한다. 그들은, 선수와는 달리, 높은 경지에서 경기를 객관적으로 관찰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세 번째, 경기를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객관적으로 가만히 관찰하는 자다. 플라톤은 관조자의 행위를 ‘쎄오리아’theoria라고 명명하였다. 이것이 관조觀照다.

수련자가 관조를 통해 획득되어야 할 그 대상의 본연을, 그 대상이 지닌 것 모양과 혼동하고 일치시키려는 어리석음을 고통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파탄잘리는 이 혼동을 ‘삼요가’samyoga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삼요가’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인위적인 결합’을 의미하는 접두사 ‘삼’sam과 ‘엮는 행위’를 의미하는 ‘요가’yoga의 합성어다. 요가는 오랜 수련을 통해 자신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샘물이지,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억지나 혼동이 아니다. 나는 본연을 관조하고 있는가? 혹은 허상을 따라고 있는가? 나는 본연과 허상을 혼동하고 있는가?

사진

<Standing on the Base Ground...I Become a Transparent Eyeball>

(에머슨 <자연> 삽화)

삽화가 Christopher Pearse Cranch (1813–1892)

펜과 잉크, 21.3cm x 14.4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