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1. (日曜日) “쌍샘자연교회”

[사진]

<사울의 회심>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카라바지오 (1571–1610)

삼나무 위에 칠한 유화, 1600, 189 cm x 237 cm

로마 Odescalchi Balbi Collection

 

지난 2월 모르는 한 분이 페북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청주에서 자연친화적인 교회를 운명하시는 목사님이시다. 목사님은 나에게 특강을 부탁하였다. 시골교회이니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2005년에 출간된 두 권의 책으로 한국교회는 나를 불편하게 생각해왔다. 교회에서, 특히 주일예배에, 나를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내 저서 <신의 위대한 질문>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질문을 통해, 나는 현대인들에게 신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내게 신을 정의하라면 이렇다. “신은 낯선 자다.” 우리가 낯선 자를 자식처럼, 부모님처럼 더 나아가 연인처럼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대접할 때, 그 낯선 자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다. 그 낯선 자는 신이다. 내 인생의 깊이와 너비를 알아보고자, 다양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와 낯선 자를 대접할 수 있는 가를 묻는 것이다. 그 낯선 자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근본주의자일 수도 있고, 나와는 다른 정치적인 성향을 지닌 혁명가일 수도 있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성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그 낯선 자는 인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물일 수도 있고 식물일 수도 있다. 아니 지구나 달처럼, 움직이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생명이 존재하여 변화하는 모든 것은 신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 신은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존재들을 움직이는 존재라고 말했는가? 신은 생명에 깃든 약동하는 생명력이다.


<인간의 위대한 질문>은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질문을 묵상하였다. 예수는, 인간 존재의 핵심을 사랑으로 보았다. 사랑은 사랑할 만난 존재를 사랑하는 자기위안이 아니라,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는 용기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원수까지 감히 사랑하는 삶을 초연하게 보여주었다. 그 감동으로 그리스도교가 탄생했지만, 그리스도교는 예수로 살 것을 교리로 만들지 않았다. 자신들이 이해한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을 것을 강요하였다. 자신들이 이해하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정리하여 교리로 만들고, 그것을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배타적으로 믿을 것을 강요한다. 그리스도교가 현대에 서서 기진맥진하여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이유는, 예수가 될 것을 요구하지 않고 예수를 믿을 것을 설교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주일에 설교한 적이 없었다. 나는 누가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페북을 통해 그 사람의 정보를 얻었다.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호정리에 위치한 쌍샘자연교회에서 일하시는 백영기목사님이시다. 나는 이 교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고, 더욱이 목사님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다. 이런 용감한 요구를 하시는 목사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페북에 그의 얼굴이 나왔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얼굴이다. 더욱이 성직자의 얼굴이 아니라 농부의 순박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나는 4월 둘째 주에 그곳에 내려가 강연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코로나는 우리 집을 거르지 않았다. 아내가 4월 첫째 주에 걸려, 나도 감염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스케줄을 조정하였다. 그래서 오늘 5월 1일에 이 교회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내가 사는 설악면에서 그곳까지 180km다. 일요일 오전이라 교통 혼잡이 예상되어, 나는 오전 11시 예배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오전 7시 30분에 출발하였다. 일찍 일어나, 샤갈-벨라-예쁜이를 산책해주고, 신선봉 고라니 2마리를 위해 사료를 커다란 나무 밑에 두고, 최근 식구가 된 단테와 루미에게 사료를 주고 마당에 풀어놓았다. 3년 전부터 키우기 시작한 금붕어에게 사료를 주었다. 3마리였던 금붕어가 이제 48마리가 되었다. 이렇게 이들이 이렇게 불어 낳는지, 하나님에게 물어야겠다.


설악IC를 나와 고속도로를 달려 중부고속도로를 달린다. 예전에는 시골에 가는 풍광을 즐겼는데, 이제는 가림막과 속도위반측정계로 운전이 즐겁지 않다. 석달 전에 약속한 강연제목이 ‘태초와 바람’이었다. <창세기> 1.1-3의 내용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오늘은 부활절 후, 세 번째 주일로 <사도행전> 9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회심이야기가 교회력에 주어진 성서구절이다. 내려가면서, 사울이 다메섹 언덕에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장님이 된 후, 3일만에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신기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도착하니 10월 40분이다. 목사님께서 나를 맞아하셨다. 예상했던 편한 얼굴이다. 얼마나 수련하셨으면 저런 얼굴이 나올까? 사람은 그녀가 지닌 얼굴 값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다. 목사님은 타인에게 편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얼굴을 가지고 계셨다. 니체가 성직자, 정치인, 그리고 정부 관리들과는 상종하지 말하고 충고하여, 가능하면, 이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백목사님은 예외였다. 나의 추측이 맞았다. 나는 목사님에게 교회이름부터 물었다. “목사님, 왜 쌍샘자연교회입니까? 이 근처에 야곱의 우물과 같은 샘물이 두 개 있습니까?”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30년 전에 청주에서 시무하던 교회입니다. 이곳으로 이주해와 ‘쌍샘’을 그대로 사용하여 ‘쌍샘자연교회’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피아노로 연주하는 찬송가 소리를 들으며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교회에 와 좌석에 앉으니,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어릴 때, 예배당에서 듣던 풍금소리가 생각났다. 사회자의 소개를 받고 교인들 앞에 섰다. 제단이 부담스러워, 올라지지 않고 교인들 앞에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제단 오른 편에 적혀진 1전傳, 1소素, 1감感이라는 표어를 나름대로 설명하였다.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면서 하나를 전傳하기 위해야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은 엉뚱하고 난해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믿는 것이다. 믿음은 자기믿음의 준말이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을 믿을 수가 없다. 만일 내가 타인의 무엇을 믿는다면, 그것은 내가 상상한 그것이지, 그것 자체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자기신뢰>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이것을 주문한다: Trust thyself! 이 명령은 우리가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신하고 있는냐를 물음이자 촉구다. 그리고 하루에 하나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유전자를 마음속에 심는 문화를 향유해야한다. 소素는 씨앗이다. 옥토에 심겨질 때, 적당한 시절에 천배만배 결실을 얻을 것이다. 우리의 하루는, 그런 씨앗을 마음에 심는 문화여야 한다. 내가 심은 씨앗은 자비, 친절, 정직과 같은 가치로 이웃들이 느낄 수 있어야한다, 그것이 1감感이다.


그 이후에 사울의 회심이야기를 전했다. <사도행전> 9장에 등장하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사울이 예수쟁이들을 처단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대제사장에게 자신이 다마스커스로 가서 그들을 체포해 송환할 수도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예수가 전한 ‘도道’를 믿는 자들이었다. 사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일이 하늘로부터 빛이 등장하여 말한다. “사울아, 사울아,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예수의 이 음성을 듣은 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 된다. 그가 3일간 장님이 된 후, 아나니아라는 선지자의 안수를 받고 다시 시력을 회복한다.


그 순간을 <사도행전> 9.18에 이렇게 기록한다.

“그 즉시 그의 눈에서 비늘과 같은 어떤 것이ὡς λεπίδες 떨어져 나왔다.

그의 시력은 회복되었고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


예배 후, 우리는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몇 분들이 자신들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가 아는 것을 가감 없이 말해주었다. 내 말이, 그들에게 도전이 되었지만,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 나는 쌍샘자연교회 교인들이 부러웠다. 자연에서 그런 목사님과 함께 자연과 생명에 대해 배우고 깨닫고 자신의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오늘, 5월 첫날, 내가 알지 못했단 한국교회의 가능성을 보았다. 내 눈에서 한국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인 비늘과 같은 것이 떨어 졌다. 쌍샘자연교회와 같은 교회가 많이 생기면 좋겠다.


예배 중에 함께 부른 찬송가 가사가 좋았다. 목사님은 그 찬송은 포항에 있는 ‘푸른마을교회’에서 지은 찬송이라고 알려주었다. 가만히 읽어보시길 바란다:


<푸른마을 가는길>

김이화 글


“빠른 길 큰길도 아닌 사과밭 돌아서 작은 길로

울퉁불퉁 낡은 길 지나 나무 계단 오르면

새소리 바람소리 주님목소리 들려요

고맙습니다 주님

흙길 밟으며 들풀과 인사하게 하신 것

고맙습니다 주님

소박한 옷에 낮으신 신게 하신 것

이제는 소중한 것 알고 한 길 가게 하소서

여기서 주의나라 이루며 살게 하소서

여기서 주의 아날 이루며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