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9.(土曜日) “필립포 아르젠티Filippo Argenti”

[사진]

<스틱스 강에서 튀어 올라오는 필리포 아르젠티>

영국 화가 시인 William Blake (1757–1827)

1820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1798-1863)는 ‘단체의 배’La barque de Dante란 작품에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배를 방해하는 분노에 찬 영혼들을 그렸다. 단태의 화는 이곳에 있는 죄인보다 더 심각하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에게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말했고, 베르길리우스는 이 강을 건너기 전에, 그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바로 필립포 아르젠티다.


단테에게 아르젠티를 만나 자신도 분노에 휩싸인다. 분노는 ‘정욕’다음으로 인간사화에 널리 퍼진 죄다. 그는 인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정의로운 분노’를 찬양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몸가짐, 마음가짐, 그리고 행동가짐을 수련하지 않고 분노에 빠진다면, ‘정의로운 분노’가 상실된다며 인간은 두 가지 늪과 같은 감정의 노예로 전락한다. 그 결여된 쪽은 ‘우울’이고 과도한 쪽은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울부짖는 분노’다.


단테 <인페르노> 제5환을 시작하는 경계는 ‘스틱스강’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스틱스강은 지하세계의 문턱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아이네이아스’에 스틱스강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는 뱃사공 카론이 죽은 자들의 영혼을 자신의 배에 싣고 강을 건너간다. 단테의 스틱스강을 자세히 묘사한다. 단테에 의하면 스틱스강은 지옥의 다섯 번째 둘레를 휘감고 있으며, 그 안에서 분노와 우울에 시달린 자들이 형벌을 받고 있다. 스틱스강은 점액과 같은 진흙으로 가득 찬 강이다. 분노에 찬 자들은 서로를 물고 뜯으며 싸우고 우울에 찬 자들은 진흙 아래에 잠겨 있다. 우울에 시달리는 자들이 내는 숨 방울만 가끔 표면으로 떠오를 뿐이다.


스틱스강에서 죽은 자들을 싣고 건네주는 뱃사공은 카론이 아니라 플레기아스다. 그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도 배에 싣고 강을 건넌다. 그리스 신화에서 플레기아스는 아폴로신이 자신의 딸을 겁탈하자 아폴로 신전을 불태운 자다.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플레기아스의 배를 타고 쾌속으로 스틱스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그때 단테는 늪에 빠진 분노한 한 영혼과 마주친다. 이 영혼은 피렌체의 아디마리 가문의 권력자 필리포 아르젠티다.


필리포는 쾌속으로 지나가던 배를 붙잡아 전복시키려 한다.단테가 고향 피렌체에서 쫓겨나 낭인생화를 시작하게 만든 장본인이 필리포 아리젠티다. 그는 단테를 고향 피렌체에서 내몰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단테와 마찬가지로 교황을 지지한 겔프 당원이지만, 후에 다시 황제를 지지해 자신이 속한 겔프(후에 ‘백색당 겔프’라고 불림)를 따돌린 원수다. 그는 사치스럽고 오만하기 그지없어 ‘아르젠티(argenti)’라는 별칭을 얻었다. ‘아르젠티’는 ‘은’을 의미하는 이탈리아 단어 ‘아르젠토(argento)’에서 파생된 단어다. 그는 자신이 타고 다니는 말의 말굽을 은으로 씌울 정도로 자기과시에 목말라있고, 안하무인이었다.


<인페르노> 제 5곡 31행과 63행 사이에 필립포 아르젠티가 등장한다. 베르길리우스가 먼저 배에 올라가고 단테가 뒤따른다. 베르길루스는 무게가 없어 배가 요동하지 않았지만, 단테가 탓을 때 배가 뒤뚱거린다. 이들이 탄 배는 스틱스강을 가로질러 깊숙이 들어간다. 그들이 정체된 강을 건널 때, 진흙은 뒤집어 쓴 한 영혼이 등장한다. 그 존재는 단테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이렇게 묻는다:

31 Mentre noi corravam la morta gora,

32 dinanzi mi si fece un pien di fango,

33 e disse: «Chi se’ tu che vieni anzi ora?».

31. 우리가 이 죽은 해협을 달리는 동안

32. 내 앞에 진흙을 잔뜩 뭍힌 자가 일어섰다.

33. 그리고 말했다. “시간 전에 온 너는 누구냐?


단테는 자신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이 질문을 던진 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단테는 진흙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의 대답은 불쌍하고 자조적이다.

34 E io a lui: «S’i’ vegno, non rimango;

35 ma tu chi se’, che sì se’ fatto brutto?».

36 Rispuose: «Vedi che son un che piango».

34.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가 왔지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35. 그런데, 이렇게 망가진 너는 누구냐?“

36.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울고 있는 자인 나를 보고 있다.”

37 E io a lui: «Con piangere e con lutto,

38 spirito maladetto, ti rimani;

39 ch’i’ ti conosco, ancor sie lordo tutto».

37. 그리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울음과 슬픔으로

38. 당신은 저주받은 영혼으로 남아있다.

39. 당신이 온통 더러움으로 덮여있어도, 나는 당신을 알아본다.”

40 Allor distese al legno ambo le mani;

41 per che ’l maestro accorto lo sospinse,

42 dicendo: «Via costà con li altri cani!».

40. 그가 자신을 손을 배로 펼쳤을 때,

41. 걱정스런 스승이 그를 떨쳐 버렸다.

42. 그리고 말했다. “떨어져 다른 개들과 함께 거기 있어라!”


분노에 찬 영혼들을 ‘개’라고 부르는 전통이 있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Iª-IIae q. 46 a. 5 ad 1)에서 동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naturaliter disponuntur ad excessum alicuius passionis, ut leo ad audaciam, canis ad iram, lepus ad timorem, et sic de aliis.” 번역하자면, “자연스럽게 과욕을 하도록 되어있다. 사자는 용맹성으로, 개는 분노로, 토끼는 두려움으로, 그리고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지상에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는 통치였지만, 분노에 찬 거만한 자로, 사후 세계에선 비참한 짐승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