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7.(木曜日) “분노忿怒(1)”

[사진]

<아벨을 살해하는 카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

유화, 1609, 131.2 cm x 94.2 cm

런던대학 코톨드 미술학교Courtauld Institute of Art 소장

 

대한민국은 분노와 우울이란 고질적인 병에 걸려 있다. 미디어에 등장한 정치인들을 보면 특히 그렇다. 분노로 가득 찬 자들은, 먹잇감을 정한 야수처럼, 눈먼 돼지처럼, 그 끝이 낭떠러지인줄 모르로 달려간다. 자신의 분노는 ‘정의롭다’고 착각한다. 아니, 정의로운지, 불의한지 판단할 능력이 마비되어, 더 이상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에서 우연히 알게 된 ‘비진리’의 상태인 ‘착각’을 남에게도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가 돼야 속이 편하다.


이들의 특징이 있다. 자만으로 가득 차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을 교훈하려 든다. 자신이 그런 인간이란 사실을 자신만 모른다. 인생이란 무대에 올라, 자신의 배역을 찾지 못하고, 야유하는 몇몇 야바위꾼들의 소리를 등에 업고 씩씩거리며 다린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공개적으로 창피를 주고 심지어는 불행해지기를 바란다. 누가나 자신의 정체되지 않는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인터넷이 그런 분노의 공허한 와글거림 전시장이다. 니체는 자기절제가 없는 대중의 노예 심리를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고 명명하였다.


정의는 자비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다른 사람 입장에서 그 문제를 심사숙고하는 역지사지의 여유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중한 가치다. 정의는 중용이다. 정의는, 내가 자신에게 또 다른 자신이 되어, 어떤 의견에 대한 깊은 묵상을 거친 겸허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정의가 될 수 있다. 이 공통의 정의가 자비다. 정의와 자비는 서로와 경쟁하고 격려하는 자매다.로마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분노를 일으켜 가장 해를 입는 자를 지적한다. 바로 분노하는 자인 ‘자기 자신’이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소리치는 행위가 분노하는 자에게 잠시의 위안은 되지만,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분노는 일을 해결하기보다는 악화시킨다. 운전을 하다 보면 무례하게 내 차 앞으로 끼어들거나, 경적을 심하게 울리거나, 경고등을 번쩍거리는 등...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과 종종 마주친다. 분노한 사람의 저지른 행위로 씻을 수 없는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은 구타당한 사람이지만, 사실 구타한 사람 자신이 영원히 분노의 노예가로 전락한다. 우리 주위에 갑질을 일삼는 사람들은 분노장애조절에 실패한 장애인들이다.아우렐리우스는 말한다.

“분노를 마음에 품고 분노를 풀 준비를 하는 불행한 사람이 있다.

분노하는 행위는 인간적이지 않다. 오히려 상냥함과 친절함이 더 인간적인 용기다.

진정한 인간은 분노나 불만에 쉽게 자신을 주는 법이 없다.

그는 분노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과는 달리 힘, 용기 그리고 인내를 가진 자다.

침착한 마음을 지닌 자가 힘이 있다."


분노하는 자는 어떤 대상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분노가 그 대상을 통해 그를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 혼돈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분노의 다른 얼굴이 있다. 바로 우울이다. 분노한 자는 홀로 있을 때, 그 대상을 찾지 못할 때, 우울하다. 우울은 외부로 폭력을 행사할 수 없을 때오는 좌절감이다. 우울은 자신을 깊이 응시하고 스스로 존경하는 마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자들에게 엄습하는 병이다. 쉽게 분노하는 자는 혼자 있을 때 우울증에 종종 시달린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일상에서 얻는 소소한 기쁨에 무감각하다.


마라톤 같은 경주에 참여해 달리고 있지만 결승점을 알지 못해 달리면 달릴수록 기진맥진하고 차라리 경주를 포기하고 싶어 한다.한국인, 특히 젊은이들은 대부분 우울증 환자다. 자신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만들 인생의 목표를 상상하거나 떠올린 적이 별로 없다. 그들은 대학 입시라는 무지막지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결승점을 알지 못하고 달리는 마라톤 선수와 같다. 초인적이며 비인간적인 노력으로 명문대에 합격했지만, 왜 자신이 그 학교와 그 학과에 속해 있는지 모른다. 대학 입시가 준 숫자에 맞춰 자신의 미래를 정해줄 대학과 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소위 전문가라는 입시학원 선생과 부모들이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이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미래를 결정한 결과다.


분노를 이길 방법은, 자기응시다. 자신이 그런 분노라는 광풍에 쉽게 휩싸인다는 인간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수련이다. 하루는 자신이 분노하는지 관찰 할수 있는 수련의 기간이다. 나는 감정적으로 분노하는가? 아니면 정의로운 분노를 언행으로 옮길 수 있는 용감한 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