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30. (土曜日) “욕망欲望과 열정熱情”

[사진]

<서 있는 사람Uomo in piedi>

이탈리아 설치미술가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aelangelo Pistoletto

Silkscreen on steel, 250× 125 × 2.5 cm, 1962.

런던 테이트 미술관

 

욕망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열정은 그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의도가 없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기쁜 찬송이다. 욕망은, 자신이 경험한 외부가, 그녀를 유혹하는 신기루이지만, 열정은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메마르지 않는 샘물로, 날마다 정신적이며 영적인 갈등을 해소시킨다. 욕망은 지금은 모르지만 지나고 보면 쪼그만 마음으로, 외부에 무엇이 있을까 서성이고, 찾는 마음으로 그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해 영원히 헤매게 만드는 피곤이다. 외부의 추구하는 욕망이 자신의 삶과 그녀를 아는 주변의 삶을 잠시 행복하게 만들다, 이내 피곤하게 만든 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욕망을 통해, 인간이 달을 정복하고 화성으로 여행을 가려고 하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쪼그만 마음이다.


욕망은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행복이 온다고 학교에서 잘못 배운 어른들의 심성이고, 열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찾아 그것에 하루 종일 몰입하는 어린아이의 심성이다. 욕망은, 누군가 알려준 삶의 행복이란 것을 획득하기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으로 걸어가는 낙타의 등에 얹어진 부담이지만, 열정은 사자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다.


욕망을 영어단어로 표현하자면, ‘디자이어desire’다. '디자이어‘는 라틴어 데시레라레desiderare에서 유래했는데, ‘별로부터sidere’ 무엇인가 올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다리는 게으름이다. 욕망은, 그 대상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호주머니에 넣겠다는 집착이며 무리다. 한자 ’욕欲‘자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사람이 목이 마르다고 계곡에 내려가 흘러 내려오는 물을 모두 마셔버리기 위해, 그 쪼그만 입을 크게 벌리는 어리석음이다. 대부분의 물을 그의 입에 남지 않고 흘러가 버린다. 자신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물의 양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 물을 모두 가두어 놓고 전부 마시려는 꼴불견이다. 현대인들은 조그만 입을 가지고 계곡물을 마셔버리겠다고 설치는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다. 그 디스토피아에서는 입이 약간 큰 자들이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다.


열정은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대상을 소유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열정은 그 대상이 없기에, 그 목적도 없고 집착도 없다. 열정은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강렬함이다. 만일 열정에 집착이 생긴다면, 그것은 열정이 아니라 욕망이다. 집착은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 버리는 인생을 초라하게 만드는 불행과 슬픔의 원인이다. 집착과 같은 곰팡이를 방치하면, 그 인간은 악취가 될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집착한다. 사람에게 집착하여 얼마나 많은 행복이 달아나는가! 정당에 집착하여 자기 진영의 이데올로기가 그를 장님으로 만들어, 마치 절벽 끝으로 달려가는 돼지 떼로 군갑시키는가! 신념이나 교리에 노예가 되어, 십자군 전쟁, 30년 전쟁, 911사태를 일으켜 얼마나 많은 살육을 신의 이름으로 저질렀는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관습이나 규칙의 첨병이 되어,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다른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을 구별하고 혐오하고 배척했는가? 당신은 그런 교리나 규율을 만들 때, 그 장소에 있었는가? 당신은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타인이 정해 놓은 법칙에 무조건 순종하는 노예인가? 인간의 많은 불행은 가만히 자신을 바라 볼 시간의 부재에서 온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 말, 그리고 언행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거울 되어야 한다.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온갖 외부의 색으로 잔뜩 칠해진 거울이 아니라, 맑고 잔잔한 호수와 같은 거울, 즉 ‘명경明鏡’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거울이 싫어한다. 왜냐하면 감추고 싶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삶에 열망을 마련하기 위해, 거울을 봐야 한다면, 거울에 찌든 때를 말끔하게 제거해야한다. 그 때는 내가 어제까지 진리하고 신주를 모시 듯이 한 것들이다.


그런 때를 벗겨낸 사람은 이 같은 사람이다. 말이 아니라, 표정이 부처와 같은 사람, 말이 아니라 걸음걸이가 예수와 같은 사람, 글이 아니라, 웃는 모습이 장자와 같은 사람,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어린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와 같은 사람. 그런 사람에겐 종교, 이념, 성향,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들은 말장난이다. 거울에 낀 때와 같다.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무함마드는 이슬람교도가 아니다. 붓다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만든 규율과 어록집에 분노할 것이다.


우리가 거울을 깨끗하게 닦은 후에, 자신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봐야 한다. 분명하게, 거침없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매섭고 섬세하고 강렬하게 봐야 한다. 그는 이 강력한 시선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는 불행, 걱정, 근심 혹은 죄책감을 경감시키거나 제거하길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슬픔으로 있는 어쩔 수 없는 욕망을 있는 그대로, 가만히 보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4월의 마지막 날, 2022년의 1/3을 보내면서, 나를 자세히 본다. 나는 욕망의 노예였는가? 아니면 열망의 화신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