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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1770-1850)
나는 누구인가? 만일 내가 나라는 존재 밖에서 나를 찾는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찾을 수 없는 추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막에 없는 보물을 찾기 위해, 막막한 사막을 온갖 장비를 동원하여, 그 보물을 찾겠다고 나서는 무모와 같습니다. 그래서 미국 초월주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기-신뢰>라는 에세이에서 “여행은 바보들의 천국입니다”라고 은유적으로 말합니다.
인간이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면, 외부에서 자신에게도 눈을 돌립니다. 단테는 35세 눈을 자신안으로 돌려, 자신의 마음 여행이야기를 100편의 시로 남겼습니다. 그것이 <신곡>입니다. 이 영상을 보는 여러분이 각자의 나이에서 에머슨이 외친, ‘자기-신뢰’라는 인생-헌장을 쓸 수 있습니까? 우리 시대, 여러분과 제가 각자에게 어울리는 ‘영적인 자서전’을 쓸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을 관찰하면, 그 자서전을 쓸 시간입니다.
여기서 ‘영적’이란 단어는 우리가 아는 교리와 건물을 가지고 있는 종교와 반대말입니다. 종교의 반대말을 무종교가 아닙니다. 신앙의 반대말은 비신앙이 아닙니다. 요즘 무종교, 비신앙, 혹은 무신론, 그 자체가 또 다른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와는 달리 영성은, 교리, 사제, 건물, 혹은 전통이 필요 없습니다. 만일 영성에 그런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나 또 다른 서투른 가르침입니다.
영성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영성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과 최고의 기술을 발휘하여 획득하여 지금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 실력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최고 무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가만히 있을 때, 평범합니다. 그 평범한 실력은 은연이며 함축이고 암묵입니다. 자신의 천하게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가만히 암시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것은 요즘과 같은 봄날, 죽었던 땅에서 화사하게 자신의 노란 왕관을 들어 올리는 민들레와 같습니다. 민들레는 자신이 어디 있던지, 상관이 없습니다. 저 우주 끝을 향해, 봉우리를 들어 올려 언젠가 자신의 씨를 하늘 높이 날겠다는 의지와 욕망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민들레의 생명의 의지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저 척박한 땅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뿌리를 내려 자양분을 빨아올려 꽃을 피웁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식물과 동물은 이 삶의 비밀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암기할 필요도 없고, 그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창피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깨우침이고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걷고 달립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우리 대부분은, 주위 사람들이 달리기 때문에 나도 달린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제는 그만 달리고, 호모 사피엔스가 이족보행능력을 잠시 포기하여 다리를 묶고, 다른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갈 시점입니다. 그 목표지점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 깊은 곳입니다. 심리학자 융은, 그곳을 ‘무의식’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인류는 너무 오랫동안 시선을 외부에 두어, 장소의 정복과 물건의 획득이 자신들에게 부, 권력, 그리고 명예를 가져온다고 믿어왔습니다. 3년 전 시작된 코로나 감염병은, 인류의 발을 묶기 위해 타인과의 만남을 제안하고, 인류의 입을 막기 위해 ‘마스크’라는 재갈을 씌웠습니다. 인류는,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이 되어야 할 자기-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인터넷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더 감추는 일리아스 뒤에 숨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겁쟁이들이 잘하는 짓이 있습니다. 무관심, 부러워하기, 시기하기 그리고 해코지하기. 현대 사회는 조지 오웰이 염려한 디스토피아가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무의식조차 뇌라는 물질의 작용이며 허상이고 진짜는 없다고 외칩니다.
저는 서양철학의 시조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를 깊이 바라보면, 그 희미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에 해당하는 ‘그노씨 세아우톤gnothi seauton’이란 문장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이 그리스 문장에서 ‘안다’라는 동사는 누구나 객관적으로 다 알 수 있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안다’는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인간이 삶의 비밀을 알려고 시선을 자신에게 돌릴 때, 비로소 조금씩 알게 되고, 과거에 자신이 신주처럼 모셨던 사상, 이데올로기, 신조를 깨치는 용기입니다. 이런 것은, 내가 오롯이 가야 할 인생이란 항해에 불필요한 사치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안다’라는 형용사는 어린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를 발견했을 때, 완전히 몰입하여 시간 가는 줄로 모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한 지식, 즉 ‘영지靈智’입니다.
이 영지의 대상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 대상을 ‘세아우톤’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아우톤’은 ‘너 자신’이란 뜻입니다. ‘너’와 ‘너 자신’을 화자 1인칭으로 다시 옮기면 ‘나’와 ‘내 자신’입니다. 전자 ‘나’는 작은 자신이고 후자 ‘내-자신’을 큰 자신입니다. 전자 ‘나’는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너’와 구별된 1인칭이지만, ‘내-자신’을 1인칭, 2인칭, 그리고 3인칭을 포함한, 심지어는 우주 전체를 포함한 ‘내 자신’입니다.
‘내-자신’은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 등장하는 산스크리트어 문장 ‘아함 브라흐마스미’aham brahmasmi에서 한없이 넓고 깊고 광대한 자신입니다. ‘내-자신’은 신에 모세에게 알려준 히브리어 문장 ‘에흐에 아쉘 에흐에ehye asher ehye’에서 뒷부분에 해당하는 ‘아쉘 에흐에’다. 아쉘 에흐에를 랄브 왈도 에머슨은 ‘오버소울’Oversoul이라고 불렀고 니체는 ‘위버멘쉬’Uebermensch라고 명령하였다.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에 가장 잘 표현했는데, 그의 시 Song of Myself에 등장하는 Myself입니다.
영지의 대상인 ‘내자신’이 누구입니까? 자신이 혁신하여 획득해야 할 그 자신을, 인류는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신을 자신 밖, 즉 교리, 사상, 이데올로기에서 찾기 위해, 인류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새로운 천년의 신 우리 각자 마음 밖이 아니라 안에 존재하는 신입니다. 그 신을 영국 시인 윌리엄 위스워스는 “something evermore about to be”라고 표현합니다. ‘이제 금방 되어야할 어떤 것’입니다. 에머슨은 그 신을 ‘원초적인 자신’ 혹은 ‘심오한 힘’으로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되어야 할 신입니다.
이 신은 우주가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한 생명의 기운입니다. 이 기운의 존재를 알고 자신의 삶 안에서 생각, 말, 행동을 구현하려는 수고가 ‘영험한 지혜’, 즉 ‘영지’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찾는 것, 그런 자신이 여러분 안에 있다는 ‘영지’야 말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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