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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아침 산책길에 며칠 전에 날라 왔던 노랑나비가 우리를 찾아왔다. 올해는 벌도 사라지고 나비도 사라졌다. 이상한 기후다. 코로나가 환경이 영향을 미쳐, 벌과 나비를 축출한 것일까? 그러기에 우리를 찾아오는 나비가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다. 나비로 갖추어야할 펄럭이는 비행이 자연스럽고 우아하다. 4월은 하루하루가 천지개벽하는 혼돈과 질서의 경연장이다. 동네 농부가 개간한 밭을 무심코 지나는데 신비한 색이 눈에 들어온다. 노란 황금색이다. 봄의 완성은 초록색이나 핑크색이 아니라 노란색이다. 벨라루스 출신 유대화가 마크 샤갈은 신과 천국을 항상 노란색으로 표현하였다. 그에게 노란색은 신神이다.
내 눈을 침입한 노색의 주인공은 ‘민들레’다. 척박한 땅에서 줄기를 하늘 끝까지 쭉 들어 올려 공중정원에 한 송이 꽃을 피운다. 한 송이에 200여개의 꽃이 모였다고 하여 ‘두상화頭狀花’라고 불린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가엽게 피어오른 민들레를 아이폰 사진기에 담았다. 민들레는 불쌍하기도 하고 늠름하기도 하다. 아니 나의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무심하다.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 과감하게 꽃을 피웠다. 아침에 꽃을 피우고 저녁에는 꽃을 닫는 새침때기다.
민들레에는 소위 꽃가루받이가 없어 수분受粉을 하지 않는다. 수술의 꽃가루가 날려 암술에 붙어 꽃을 피우거나 열매는 맺는 다른 식물들과 다르다. 같은 꽃 안에서 생식을 하는 자가수분自家受粉도 아니라 벌이나 나비를 통해 생식하는 타가수분他家受粉도 아니다. 소위 무수정생식으로 스스로 ‘어머니이면서 자식’이다. 고대 이집트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신인 ‘아툼’Atum과 같다. tm이란 고대 이집트 어근은 이스라엘을 거처 유럽으로 들어왔다. 그 의미는 ‘스스로 완전한’이란 뜻이다. 영어이름 ‘톰’Tom 혹은 ‘토마스’Thomas는 ‘쌍둥이’라는 뜻이지만 원래의미는 ‘온전穩全’이다. 본바탕 그대로 완전한 상태다. 아툼신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기 전에 등장한 신으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한다. 민들레는 ‘아툼’신이다.
이 민들레 꽃다발들을 떠받치고 있는 총포를 가만히 살펴보니, 아래로 낱낱이 처졌다. 이 민들레는 재래종 민들레Taraxacum platycarpum가 아니라 서양민들레Taraxacum officinale다. 저 머나먼 땅에서 날라 온 민들레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풀잎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자신의 존재를 한량하고 무심하게 뽐낸다. 어떤 민들레들은 자신이 안주할 토양만 있으며 약한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줄기를 내고 4-5월에 꽃을 피운다.
민들레는 인내와 연습의 화신이다. 민들레 홀씨는 자신을 가장 가볍게 만들어 어디로든 날라 간다. 그리고, 적당한 토양을 찾아 안착한다. 그 토양이 척박하냐 비옥하냐는 자신의 꽃을 피우는데 중요하지 않다. 인류를 진화하고 진보시킨 원동력은 척박한 역경이다.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의지가 희망이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행위가 용기다.
교육敎育은,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할 때, 시작한다. 지혜로운 자는, 대부분 사회가 요구한, 남들에 정해놓은 일정한 교육을 이수한 후에,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 시작한다. 그(녀)는 안다. 누구를 쳐다보고 부러워하고 흉내 내는 일을 어린 시절 장난이었다는 사실을. 교육은 민들레처럼, 자신이 찾은 땅에서, 그것이 어떠하든지,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을 완성해야할 유일한 환경이라고 여기는 의연한 마음이다.
민들레 봉우리의 한 개 한 개의 낱개 꽃잎은, 거친 땅에 뿌리를 통해 끌어올린 자양분을 통해 완성한 예술작품이다. 자신의 기반인 그 토양을 떠나서는 꽃을 받치는 봉우리도 없고 꽃도 없다. 자신만이 그 토양을 선택할 수 있고 자신만이 꽃을 피울 수 있다. 자신의 토양에서 피운 꽃이 가장 아름답다. 다른 꽃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나 유유자적하고 신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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