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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19. (火曜日) “의도성意圖性”

[사진]

<‘병원에 있는 에드바르 뭉크’ 자화상>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

유화, 1909, 100 × 110 cm

노르웨이 베르겐 KODE Art museums

 

인간이 자신에게 몰입하고 그 개성을 개발시킬 때, 행복하고 자연스럽고 삶의 환희를 느낀다. 그 누구도 넘보질 못할 카리스마를 자신의 몸에 배게 만들 수 있다. 자신에게 오롯이 몰입할 수 없을 때,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향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감이 있어야, 타인의 장점을 인정할 수 있고 심지어 축하할 수 있기 때문에다. 휘트먼이 Song of Myself에서 말한 ‘자신을 축하하는 경지’는 19세기말 인류를 찾아온 민주주의와 민주시민의 자질이다.


현대처럼 다양한 시각적으로 청각적 기기로 자기집중을 방해했던 시대로 없었다. 현대는 우리에게 그 가상세계로 들어가 ‘알리아스’ 즉 가짜로 부여받은 아이디로 살라고 유혹한다. 그런 현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말과 글로 표현하지 않고 타인에 대해 감정적으로 표현하는데 익숙하다. 타인의 다른 점을 그 존재가 지닌 개성으로 수용하는 연습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그 대상의 다른 점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하나는 흠모이고 다른 하나는 시기다. 사실 흠모와 시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흠모가 지나치면 곧 시기로 변하다. 심지어 자신의 마음속에 싹튼 시기를 방치하면, 그 시기가 점점 악의로 변해, 타인을 다양한 방법으로 해코지한다.


타인에게 가하는 해악은 그 동의에서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의도 없이 무심코 한 해악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성을 가진 해악이다. 전자에는 자신도 그런 악행을 하지는 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하는 해악이 포함되어 있지만, 엄격하게 구분한다면, 의도적인 해악이 반복된 행위다. 단테는 지옥을 상지옥과 하지옥으로 구분한다. 이 구분을 ‘의도意圖’라는 개념을 통해 나눈다. 상지옥을 자신을 절제하지 못한 인간의 영혼들이 형벌을 받는 장소다. 상지옥의 전체 주제는 ‘무절제’다. 무절제는 주로 자신에 스스로에게 가하는 죄들이다.


인간이 자신을 응시한 적이 없어,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는 죄들이 있다. 색욕, 식탐, 인색과 방탕, 분노와 우울과 같은 죄들이다. 이 죄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절제’다.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는 소홀이다. 그것은 마치 학교에서 글을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글을 쓰려는 시도와 같다. 누구의 조언을 받은 적이 없어,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줄, 간격, 부호를 무시하고 마구 쓴다. 그 글에 절제가 없다면, 그 내용이 상대방에게 잘 전달될 리가 없다. 어려서부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마구 말한다. 그는 경청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절제는 의도적이지 않다. 단테는 무절제를 가장 초보적인 죄로 여겼다.


단테는 <인페르노> 제9곡에서 ‘무절제’와는 다른 죄를 소개한다. 이 죄는 그 행위를 저지르는 자의 개인에 국한된 무절제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줄 목적으로 저지른 죄다. 즉 ‘의도’를 지니고 남에게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죄다. ‘의도’는 인간의 죄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지옥은 첫 번째 다섯 환은 소위 ‘상부지옥’이고 나머지 네 환은 ‘하부지옥’이다. 제9곡은 상부지옥과 하부지옥을 구분하는 경계의 지형적인 특징과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원칙을 설명한다.


상부지옥은 색욕, 식탐, 인색과 욕심, 혹은 분노와 우울과 같은 죄를 다룬다. 이 죄들은 하부지옥에 등장하는 죄들과 비교하여 가볍다. 이 죄들은 자신의 분수分數를 몰라, 그 분수를 수련한 적이 없는 이들의 자연스런 상태인 ‘무절제’無節制다. 무절제란 자신의 행위가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욕망에 허물어져 죄를 저지른다. 하부지옥에서는 상부지옥보다 심한 죄들이 등장한다. 이단, 폭력, 사기, 그리고 반역이다. 이 죄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의도적’意圖的이다. ‘무절제’의 죄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죄라면, ‘의도적인 죄’는 자신의 행위가 악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행해진다. 한마디로 능동적이다. 무절제의 죄와 의도적인 죄의 또 다른 기준은 그 죄가 끼치는 해악의 범위다. 무절제의 죄는 개인의 죄로, 그 해악이 한 사람에게 국한된다. 그러나 ‘의도적인 죄’는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내 가족, 연인, 스승, 공동체, 혹은 불특정 다수다.


단테는 하부지옥의 특성을 ‘의도성’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에 어울리는 인위적이며 견고한 지형을 소개한다. 상부지역의 이야기는 개인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광활한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러 하부지역의 이야기는 다르다. 의도성을 지닌 개념이자 건축물이 등장한다. 바로 ‘디스’Dis라는 도시다. 디스는 고대 그리스 지하의 신은 플루토Pluto의 명칭이며, 그가 거주하는 장소다. 디스의 성벽은 타락한 천사들인 악마들이 지킨다. 의도적인 죄를 저지른 자들을 ‘디스’라는 도시 안에 감금되어 형벌을 받는다. 단테에게 ‘도시’는 인간이 신의 섭리에 의도적으로 반항하며 도전하는 상징이다. 구약성서 <창세기>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이야기’가 인간의 신에 대한 의도적인 반역이다. 인간의 말과 언어가 아직 구분되지 않는 최초의 시간에, 사람들이 평원에서 거주하였다. 그러자 그들에게 ‘의도’가 생겼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의견을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וַיֹּאמְר֞וּ הָ֣בָה ׀ נִבְנֶה־לָּ֣נוּ עִ֗יר וּמִגְדָּל֙ וְרֹאשֹׁ֣ו בַשָּׁמַ֔יִם

וְנַֽעֲשֶׂה־לָּ֖נוּ שֵׁ֑ם פֶּן־נָפ֖וּץ עַל־פְּנֵ֥י כָל־הָאָֽרֶץ׃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도시와 성탑을 건설하고, 그 끝을 하늘에 닿게 만들자!

그리하여 우리의 명성을 높이고, 땅 위에서 흩어지지 말자.”

(<창세기> 11.4)


하부지옥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이 안에는 신을 의도적으로 배신한 이단자들과 그들을 추종한 자들이 감금되어있다. 단테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그 신앙이 부족한 자들과 거부한 자들을 위한 특별한 공간을 지옥에 마련하였다. 그 첫 번째 부류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알지 못했던 의로운 이방인들을 ‘무절제’를 범한 죄인들이 형벌을 받고는 ‘상부지옥’의 입구인 ‘림보’에 배치하였다. 그리스-로마 철학자들과 시인들, 특히 베르길리우스도 이 장소에 거주했다. 두 번째 부류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거절한 영혼들은 ‘의도적인 죄’를 범한 죄인들이 감금된 ‘하부지옥’에 들어가는 입구에 감금되었다.


내는 의도적인 악행을 행하고 있는가? 혹은 그 악행을 반복하여, 그것이 타인에게, 타동물에게, 자연에게 해를 끼치는지 모르는 무감각증 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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