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7. (日曜日) “니체의 행복幸福”

[사진]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카소니 캄파니 장인 Maître des Cassoni Campana

유화, 1525

Musée du Petit Palais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3부 세 번째 글 (47/80)에서 ‘의지에 반하는 행복에 관하여VON DER SELIGKEIT WIDER WILLEN’라는 글을 썼다. 오랜 홀로 수련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 심연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소리를 독백형식으로 기록한다. 차라투스트라에게 ‘행복’(젤리히카이트Seligkeit)이란 ‘자기-극복’을 통해 궁극적으로 재현하고 체현하고 싶은 성배다. 이 행복은 제레미 밴덤이 말하는 외부가 가져다주는 오감을 자극하는 편함이 아니라, 오히려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견뎌야 할,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다. 이 성배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상상하고 추구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연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의지에 반하는 행복에 관하여’는 그런 행복의 무위성과 무작위성에 대한 단상이다.


니체는 이 글의 제목을 괴테의 시 <의지에 반하는 사랑>에서 따왔다. 괴테는 사랑이란 변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Die Liebe wider Willen

의지에 반하는 사랑

Ich weiß es wohl und spotte viel:

저는 잘 압니다. 그리고 많이 조롱합니다.

Ihr Mädchen seid voll Wankelmut!

여러분의 소녀들은 변덕쟁이들입니다!

Ihr liebet, wie im Kartenspiel,

Den David und den Alexander;

여러분은, 카드놀이에서처럼,

킹오브스페이드인 다윗이나 킹오브클럽인 알렉산더를 사랑합니다.

Sie sind ja Forcen miteinander,

Und die sind miteinander gut.

그들은 서로 힘을 겨루고

서로 잘 어울립니다.

Doch bin ich elend wie zuvor,

Mit misanthropischem Gesicht,

그러나 나는 염세적인 표정을 지으며

예전처럼 비참합니다.

Der Liebe Sklav, ein armer Tor!

오, 가여운 노예여, 오 가난한 바보여!

Wie gern wär ich sie los, die Schmerzen!

제가 어떻게 이 고통을 기꺼이 제거할 수 있을까요!

Allein es sitzt zu tief im Herzen,

Und Spott vertreibt die Liebe nicht.

그것이 심장 깊숙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조롱이 사랑을 내쫓습니다.


괴테에게 사랑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통을 선사하지만, 니체는 그런 낭만주의적이며 염세주의적인 감성을 뛰어넘는 행복을 기술한다. 그가 분명 독일 낭만주의 문학과 예술의 세례를 받았지만, 사르트르나 쇼펜하우어처럼 허무주의나 염세주의로 빠지지 않았다. 이 점에 그를 동시대 다른 철학자들이나 문인들과 구별하게 만드는 핵심이다. 그 행복이 발견되는 장소는, 역설적으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되는 양심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양심에 대해, 환희의 노래를 불렀다. 니체는 홀로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MIT solchen Rätseln und Bitternissen im Herzen fuhr Zarathustra über das Meer. Als er aber vier Tagereisen fern war von den glückseligen Inseln und von seinen Freunde da hatte er allen seinen Schmerz überwunden: siegreich und mit festen Füßen stand er wieder auf seinem Schicksal. Und damals redete Zarathustra also zu seinem frohlockenden Gewissen:

이러한 여러 가지 수수께끼와 쓰라림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차라투스트라는 항해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흘동안 여행으로, 행복한 섬과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때서야 자신의 모든 고통을 극복하였다. 그는 승리의 기운으로 자신의 굳건한 발로 다시 자신의 운명을 밟고 섰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기뻐 환호하는 자신의 양심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가 행복을 보장하는 섬과 친구들과 떨어져 4일 동안 홀로 항해를 하면서 기적이 일어난다. 그가 모든 고통을 극복한 것이다. 고통을 가져다 준 운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운명을 두 발로 굳게 밟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환희에 찬 양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Allein bin ich wieder und will es sein, allein mit reinem Himmel und freiem Meere; und wieder ist Nachmittag um mich. Des Nachmittags fand ich zum ersten Male einst meine Freunde, des Nachmittags auch zum anderen Male-zur Stunde, da alles Licht stiller wird. Denn was von Glück noch unterwegs ist zwischen Himmel und Erde, das sucht sich nun zur Herberge noch eine lichte Seele: vor Glück ist alles Licht jetzt stiller worden.

나는 다시 홀로 있고, 홀로 맑은 하늘과 광활한 바다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 주위는 다시 오후가 되었다. 나는 일찍이 처음으로 나의 친구들을 발견했던 때도 오후였고, 두 번째도 오후였다. 모든 빛이 점점 고요해 지는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 행운은 자신의 숙소로 한 맑은 영혼을 찾고 있다. 모든 빛은 행복에 넘쳐 지금 더욱 고요하게 되었다.


‘맑은 하늘과 광활한 바다’라는 표현은 니체가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보는 편지에 등장한다: “태양이 빛나면, 나는 언제나 바다 근처 고독한 바위로 산책합니다. 거기에서 나의 파라솔 아래에서 도마뱀처럼 누어 제 두통을 치료하였습니다.” 니체는 인간세상으로 내려가 동료를 찾는다. 그 동료는 머리가 굳어진 어른이 아니라 어린아이다.


O Nachmittag meines Lebens! Einst stieg auch mein Glück zu Tale, daß es sich eine Herberge suche: da fand es diese offnen gastfreundlichen Seelen. O Nachmittag meines Lebens! Was gab ich nicht hin, daß ich eins hätte: diese lebendige Pflanzung meiner Gedanken und dies Morgenlicht meiner höchsten Hoffnung! Gefährten suchte einst der Schaffende und Kinder seiner Hoffnung: und siehe, es fand sich, daß er sie nicht finden könne, es sei denn, er schaffe sie selber erst. Also bin ich mitten in meinem Werke, zu meinen Kindern gehend und von ihnen kehrend: um seiner Kinder willen muß Zarathustra sich selbst vollenden.

오, 내 삶의 오후여! 내 행복이 머물 곳이 있을 계곡(인간세계)으로 내려갔을 때, 그 때야, 내 행복이 열린 마음을 지닌 친절한 영혼들을(사상을 전달한 제자들) 발견하였다. 오, 내 삶의 오후여! 내가 한 가지를, 곧 나의 사상들의 살아있는 식수와 나의 최고 희망(초인이 되는 것)의 아침놀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들 포기하지 못하겠는가! 일찍이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와 자기 자신의 희망의 어린아이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보라, 창조하는 자는, 우선 어린애를 창조하지 않고는 그들을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나의 어린애들에게 가거나, 어린애들로부터 되돌아오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수행하고 있다. 자기-자신의 어린애들을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기-자신을 완성하지 않으면 않된다.


창조하려는 자는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 내려가, 그 안에서 잠자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해야한다. 본연의 자기-자신이라는 어린아이가 그(녀)을 인도할 것이다. 그 옛날 길가메시가 내려갔던 페르시아만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나끄바’naqba다. 그는 그 곳에서 자신을 어린아이로 둔갑시킬 불노초를 발견하였다. 불로초란, 오감으로 확인되는 풀이 아니라, 자신의 심연에 간직된 자기-자신이라는 어린아이를 일깨우려는 각성이다. 그 각성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