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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첼리 주기도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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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항상 두터운 막대기 망치로 내 머리를 친다. 근대역사에서 아무도 들어가 보지 못한, 구스타브 융을 제외하고, 인간의 심연으로 내려가, 인간다운 삶을 위한 노래를 목청껏 외쳤다.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추상적인 단어가 지니는 신적인 아우라는, 그 내용을 파악하기도 전에, 수용해야만 하는 십계명이 되었다. 국민이 주인이 되어야한다는 주장에서, 누가 국민인가? 우리는 국민의 정체적인 이성적으로 글고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니체는 ‘대중’을 알맹이가 없는 빈껍데기이며, 국가는 그 빈껍데기를 운영하는 가장 고약한 우상이라고 단언한다.
불평등이 정의이고 불평등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는 니체의 주장은 격한 반발을 가져왔다. 만민 평등이라는 기치를 들어 올린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19세기 말, 니체의 주장은 시대를 역행하는 반란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정치적 진보로 여겼기 때문이다. 니체는 민주주의라는 구호와 평등주의의 원칙이 그 구성원들이 지닌 천재성과 천재성의 발휘를 고갈하고 말살하여 인류를 퇴보의 나락으로 이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니체에 의하면, 근대민주주의는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 평등에의 의지를 추구하였다. 여기서 힘이란, 개인이 지닌 욕망에 의거한, 무의식과 잠재력의 발휘다. 평등에의 의지는 상승의 원리인 힘을 억압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난쟁이와 두더지를 등장시킨다. 이들은 모두 ‘중력’을 상징한다. 중력은 역설적으로 지구를 유지하는 힘의 원리이지만, 동시에 생물을 서서히 소멸시키는 무덤이다. 중력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려는 무책임이다. 프랑스에서는 혁명대중이 왕정을 폐지하고 국왕 루이 16세를 처형하였다. 그 이후, 대중과 대중문화, 민중과 민중사상과 정치, 그리고 국민과 국민의 정치가 역사의 전면에 나서 선봉장이 되었다.
그러면 대중은 누구인가? 얼굴이 없는 비역사적인 존재로 힘의 질서를 거부해온 반역의 무리다. 니체는 대중을 그렇게 보았고, 그런 대중을 혐오했다. 그는 대중을 ‘천민’Poebel, ‘다수’Menge, ‘민중’Volk, 짐승떼Herde, 떼 짐승 Herdentier, 잡것Gesindel로 불러 매도하였다. 심지어 그들을 파리 떼 혹은 ‘인간말종Lastman’이라고 불렀다. 니체가 주장한 귀족주의는 정신만 강조하는 그런 나약한 정신문화가 아니다. '진정한 귀족'이 되기 위해서는 정신적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것을 갖추기 위한 도구가 바로 신체다. 니체는 그런 ‘새로운 귀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고난 귀족, 혈통 상의 귀족이 있을 뿐이다...
정신 하나가 귀족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
먼저 정신을 귀족으로 만드는 뭔가가 있어야한다.”
니체에게 철학적 귀족주의 역사를 연 인물로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그리고 키에크케로그를 뽑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공개적으로 민중을 경멸하여,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질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질 못한다고 선언한다. 후에 예수는 이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그는 고향 에베소스를 떠나 은거에 들어갔다. 그는 “탁월한 인간은 만 명의 인간 못지 않다”라고 말했다. 니체도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어중이떠중이가 모여 사는 도시 ‘얼룩소’를 등지고 산정의 동굴로 올라갔다.
피타고라스는 민중을 멀리하였다. 그 방안으로 민중이 제일 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것이 ‘잡담雜談’이다. 잡담은 영혼을 혼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은거하지는 않았다. 그는 높은 신분으로 선택된 자들을 위한 교단을 세웠다. 그 교단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명상, 수련, 그리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목표는 영혼 정화였다. 영혼을 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침묵’을 선택하였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경지의 음악音樂, 수학數學, 그리고 천문학天文學을 권장하였다. 음악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선율을 배열하여 인간의 영혼을 상승시키는 예술이다. 수학은 겉보기에는 어수선한 대상안에서 그 원칙을 최상의 추상인 숫자를 통해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는 기술이다. 천문학은, 지구를 포함한 수많은 별들이 인간이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비를 조금씩 알아가는 학문이다. 그가 크로톤에 정착하여 자신의 이상 정치를 펴고자 했으나, 민중이 들고 일어나 그의 추종자들을 처단하고 그를 추방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니체에게 최고의 정치인이었다.
귀족주의 원형을 찾으라면, 고대 그리스로 올라간다. 귀족이란 뜻의 영어 단어 ‘아리스토크랫(aristocrat)’은 숨겨진 본래 의미가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깨닫고, 그것을 발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아레테(arete: 어떤 종류의 우수성, 또는 도덕적 미덕)를 ‘인간 노력의 탁월함’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아레테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서 노력하는 과정에 서서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레테는 자신이 최선을 이루겠다는 결심과 노력이다. 운동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지속적인 마음이다. 자신이 무엇을 이뤄야겠다는 확신, 이를 지속적으로 완성해나가려는 겸손에서 아레테는 시작한다.
그리스 교육체계는 암기가 아니라 참여다. 매일 체육관에서 운동을 통해 육체를 연마하는 것과 같다. 그동안 알지 못하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무식을 인정하는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무아(無我) 상태를 연마해 정신적인 최선을 지향한다. 거기에는 사지선다가 없다.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성적이 아니라 경쟁이다. 이들은 육체적으로 올림픽 경기를 통해 경쟁하는 것처럼 시·산문·연극·음악·그림·연설을 통해 아레테를 연마했다.
아리스토크랫은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적·정신적 환경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을 끊임없이 한다. 타인의 다양한 마음을 진실로 이해하고 그들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이 공부다. 이런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다. 이에 따라 공동체는 그를 지도자로 인정해 자연스레 그를 ‘선’과 ‘존경’의 화신으로 여긴다. 그리스어로 ‘티메(time)’는 아레테가 가져다주는 명예(名譽)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최선을 지향하는 노력이 아레테다. 스스로 최선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레테는 떠나버린다. 오랜 연마를 통해 아레테에 이른 이에게 공동체는 공적으로 명예를 부여한다. 개인이 아무리 탁월하다 하더라도 도시라는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 인정받아야 한다. 명예는 한 개인이 자신의 고유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길 시도할 때 공동체 구성원이 그에게 주는 신의 선물이다.
최근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르는 ‘주기도문’ 영상을 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누구도 보질 못한 세계를 목도하고, 그것을 자신의 보잘 것 없는 몸을 통해 표현하였다. 귀족이란, 감동적인 가치를 자신의 몸을 통해 표현하는 자다. 나는 귀족인가? 아니면 남이 하는 이야기나 노래를 되새김질 하는 천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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