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1. (月曜日) “비겁卑怯”

[사진]

<겁장이 사자를 만나는 도로시>

The Wonderful Wizard

초판, 1900

 

프랭크 바움의 소설인 ‘오즈의 마법사’에 특이한 사자가 등장한다. 용맹스런 초원의 왕인 사자가 아니라, 꼬리로 자신의 엉덩이를 휘감은 사자다. 자신이 밀림의 왕인 줄 모르는 겁쟁이다. 그는 용기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마법사가 겁쟁이 사자에게 용기를 주려 하지만, 사자는 그것을 받을 자신이 없다. 사자는 “용기를 달라고 마법사에게 물어보기가 두려워!”라고 말하며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면서 도망친다.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 소녀 도로시와 허수아비가 사자를 막아 왜 도망치느냐고 묻는다. 사자는 “(두려워 자신의 발로 꼬리를 감추면서) 어휴”라고 한숨지으면서 “누군가 내 꼬리를 잡아당기고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자 허수아비가 “네가 잡고 있잖아”라고 나무란다.


꼬리는 사자가 달릴 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혹은 멀리 있는 동료 사자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신호다. ‘두려움’ 그 자체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위험에 직면한 자가 스스로 선택한 감정일 뿐이다. 그(녀)는 무모함을 택할 수도 있고 두려움을 택할 수도 있다. 과도한 두려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의 편견으로 상대방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 생산해낸 과도한 두려움이, 그 당사자를 겁쟁이로 만든다.


‘비겁’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카워드(coward)’는 ‘꼬리’를 의미하는 라틴어 ‘카우다(cauda)’에서 유래했다. 겁에 질린 동물은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꼬리를 돌리거나’ 혹은 도망칠 수 없는 경우 자발적인 복종의 표시로 ‘꼬리를 다리 사이로 감춘다’. 도망치지 않고 상대방의 결정을 운명적으로 기다리겠다는 굴욕의 표시다. ‘카우다’에 붙은 접미사 ‘ard’는 경멸을 의미하는 고대 프랑스어다. ‘카워드’의 그 원래 의미를 살려 풀어 설명하자면 ‘상대방이 두려워 스스로 자신의 꼬리를 말아 두 다리 사이에 모으고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이다.


겁쟁이는 자신의 장점인 ‘꼬리’의 기능을 인식하지 못하고 발휘할 꿈도 꾸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단점으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은 자다. 위험에 처했을 때는 두 발로 딛고 일어서 자신이 치고 나가야 할 방향으로 꼬리를 이용해 달려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 아니 자신이 미리 상상한 두려움에 굴복당해 꼬리를 감추고 자신을 비극의 희생자로 전락시킨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겁쟁이를 자기 신뢰가 부족한 상태로, 무모한 자를 자기 신뢰가 과도한 자로 설명한다. 용기 있는 자는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도 과소평가하지도 않는다. 그는 상대방에 대한 평가를 자신이 과거에 가졌던 인상이나 남들의 평가나 소문에 의지하지 않는다. 현재 지금 있는 그대로를 직시한다. 이런 능력을 바로 ‘용기’라고 부른다. 용기는 중용이다.


지옥으로 들어갈 참인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지옥도 거부한 사람들의 처참한 울음소리를 듣는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에게 묻는다. “스승님, 내가 듣는 이 신음 소리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고통 속에서 울부짖습니까?” 베르길리우스는 답한다. “이 불쌍한 사람들은 불명예스럽지도 않고 칭찬받지도 않는 미지근한 불쌍한 영혼들입니다.”(지옥 제3편 34~36행) 이들은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는 안정만을 인생의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좋은 일을 시도하지도 않고 나쁜 일을 도모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우주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르는 폐품들이다. 이들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자들이다. 단테는 이들을 지옥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영혼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죽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상에서 "살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테는 이들의 행위를 이탈리아어로 '윌타'(vilta)라고 명명했다. 윌타는 축자적으로 ‘소심함’이다. 그는 너무 소심하고 겁이 많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임무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설령 안다 할지라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단테는 비겁한 자들을 지옥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최악의 인간으로 묘사한다.


나치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작가 엘리 위젤(1928~2016)은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중립적인 행위는 비겁이고 인류의 최악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198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인간이 고통을 당하거나 창피를 당할 때마다, 그런 고통과 창피를 당하는 장소에서 항상 침묵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편을 들어야 합니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압제자를 돕는 것이지 피해자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침묵은 괴롭히는 주동자를 독려합니다.” 위젤은 가공할 만한 역사적 사건과 폭력 앞에서 아무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을 악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런 비겁한 자들의 머리에는 ‘자기이익’이라는 신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정신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은 정보 안에서 자신이 익사하는 줄도 모르고 하루를 연명한다. 마치 바퀴벌레가 자신이 발견한 설탕 조각 하나에 탐닉하듯이, 외부의 자극에 취약해 쉽게 반응한다. 비겁은 무시무시한 대상 앞에서 도망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비겁은 자신의 모습을 매일 직시하지 않는 습관이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출 거울을 소유하지 않고, 끊임없이 습관적으로 타인의 이미지에 탐닉한다.


비겁은 자신이 간절하게 바라는 위대한 자신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다. 이런 자신을 상상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하는 행위란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 훔쳐보고 부러워하는 일이다. 미국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부러움은 무식이고 흉내를 내는 것은 자살행위다’고 외치지 않았는가! 비겁은 자신에게 최적화된 전략을 짜지 못하는 상태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엮어내는 기술의 부재다. 나는 비겁한 자인가, 혹은 용기 있는 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