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金曜日) “소명召命”

[사진]

<카를 구스타프 융 (1875-1961)>

사진, 1935, 17cm x 21cm

Medium Fotografie : Papierabzug, auf Karton montiert

스위스 취리히 ETH Library

 

2022년의 시작이 엊그제였는데, 벌써 1/4이나 지났다. 나는 이런 글을 2022년 12월 31일에, 2022년을 아쉬워하며 쓸 것이다. 인생이란 덧없는 순간을 감안하면, 우리는 그 여정이 상징하는 어려움과 달성불가능에 대해 그리 고민할 필요가 없다. 개성의 완성은 이정표里程標이지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이상을 향해 매일 매일 조금씩 정진할 때,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는 대중의 일원이기를 그만두고, 그 밖에 의연하게 서 엑스트라로 서 있을 수 있다. 그런 용기가 그런 자를 엑스트라-오디너리extra-ordinary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상충하는 두 세계 안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한 세계는 자유가 활동하는 세계다. 우리의 삶은 각자가 정한 정성스런 목표를 향해, 조금씩 정진한다. 또 다른 세계는 그런 자유를 포기할 때, 우리도 모르게, 군림하고 점령하는 삶이다. 그곳에선 누군가가 우리의 동의 없이 만든 법이 지배하는 세계다. 이 법은 우리가 속한, 20세 초에 등장하기 시작한 ‘국가’라는 새로운 우상이 대중의 통치를 위해 만든 스핑크스다. 그 스핑크스는 묻는다.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법의 제재를 받을 것인가.


오늘날 터키의 파묵깔레에서 노예로 태어나 갖은 어려움과 고문으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학문에 뜻을 두고 스토아 철학자가 된 사람이 있다. 그는 인생말년에 그리스 북부 니코폴리스에 철학학교를 세운, 에틱테토스다. 그는 자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유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는 권리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자유를 구가할 수 있을까?


최근 그런 자유에 대한 이상과 좌절을, 미국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자 토마스 소웰(Thomas Sowell, 1930-)은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소웰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가난한 흑인으로 태어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미국사회에 정착한 구조적인 불평등을 연구해왔다. 세계는 통치하는 사람들과 통치를 받는 사람들로 구분된다. 통치자들은 정치인, 고위관료, 가짜 자본주의자, 과학계를 좌지우지하는 소수 그리고 주류언론이다. 소웰은 <기름부음 받은 자들의 이상The Vision of the Anointed>라는 책에서 이런 부류를 ‘선택된 엘리트들’the anointed elite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선진적인 삶을 만들기 위해 타인을 인도할 천직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자들이다. 대부분의 피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율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예언한대로, ‘감시당하고, 검열당하고, 스타이질당하고, 법의 제재를 받고, 조절당하고, 교도소에 갇히고, 세뇌당하고, 설교당하고, 제지당하고, 평가당하고, 체포되고, 비난당한다.’ 이 기름부음을 받은 엘리트들은 자신의 알량한 이상을 토머스 헉슬리가 말한 ‘멋진 신세계’에서 실현시키려고 애쓴다.


최근 러시아 독재자 푸틴과 그를 둘러싼 부하들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해악을 보면서, 정말 세상에 악과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악마가 존재한고 확신하게 되었다. 악이 푸틴을 그 일당들을 사로잡아,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 고글, 라흐마니코프, 호로비츠, 솔체니친을 낳은 러시아를 전범집단으로 변질시켰다. ‘절대권력은 반드시 타락한다’는 액톤경의 명언이 이처럼 확연하게 증명된 적이 없다.


우리는 권력 지향적인 통치계급들의 뒤틀린 마음에서 만들어진 그들의 성난 발톱에 걸려들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심층심리학자 구스타브 융은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의 가능성을 정치, 경제, 혹은 미디어가 찾지 않는다. 그들이 현자라고 내세운 사람들의 공허한 말들이 해결한 적도 없고 해결하지도 못한다. 융은 그 해결책을 각자가 자신의 마음에서 찾을 것을 요구한다. 더 자유로운 사회와 세계를 위한 긍정적인 사회변혁은, 그것을 지향하는 개인과 개성의 신장에서 효과를 산출할 수 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권력을 휘두르는 법이나 그들이 획책하는 속임수로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그런 변화는 선전, 청문회, 혹은 다수의 폭력을 가장한 다수결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없다. 집단의 변화는, 집단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집단은 실재가 없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선호, 그들의 가치관과 인생관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자신을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하고 결연하게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조금씩 일어난다.


그렇다면, 그런 변혁을 실천하는 개인들이 많아지는가? 그런 개인들이 많이 생겨, 전체주의적 통치를 막을 수 있는 가능한 조치들이 있는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정치>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부는 작을수록, 좋습니다. 법이 작아질수록, 비밀스런 권력도 작아지기 때문입니다. 정부 권력의 남용에 대한 처방전은, 각기 다른 개성들이 힘을 얻는 것입니다. 즉 개인의 성장이죠. 대리인이 아니라 본인이, 정부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현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개인의 소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얄팍한 흉내인 미디어가 아니라, 현명한 개인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유, 문화, 대화, 변화를 통해 개성을 형성하고 발휘합니다. 그런 현명한 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합니다. 그런 현명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국가는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개성의 등장흔 국가를 불필요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그런 현명한 개인들이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개성은 어떻게 신장될 수 있는가? 개성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사적인 노력을 통해 완성된다. 자기의 완성이란, 자신의 가능성을 격려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 각성만이, 그(녀)가 갇혀있는 한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는 여정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성의 신장은, 긴 여정이다. 모든 생물학적이고 사회적이며 영적인 면에서 개인이 지닌 자신만의 특이한 개성을 완벽하게 갈고 닦는 연습이다.


개성의 실현은 자기실현을 위한 목표를 세우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특이한 삶을 위한 소명의 발견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소명은 개인을 운명적으로 대중으로부터 구별시키고 그들이 좋아하는 잘 닦여진 길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만든다. 소명을 소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응답하여 삶의 목적을 발견한다는 의미다. 양심은 특별한 지식으로 우리를 고양시키는 내면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 응답할 때, 우리는 대담한 목표를 추구할 수 있고 온전히 헌신할 수 있다. 자기실현은 그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자기를 초월하고 극복하려는 과정 중에 나오는 부작용이다. 그것은 부작용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려는 자유를 구가하는 여정은 매 순간이며 진행형이다. 대한민국이 그런 교육을 시작할 때다. 더 늦기 전에, 저마다의 개성을 존중하게 자긍심이 고취되는 다양한 교육을 시작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