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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를 머금은 소나무>
2022.3.9. (水曜日, 20대 대선) “소신所信”
민주주의는 유지가능한 정체체제인가? 정치체제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 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정치 혹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다. 민주주의는 대중문화와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의 교양과 소양으로 구성된 허술한 건축물이다. 민주주의가 거대한 건물이라면, 시민이나 국민은, 그 건물을 견고하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벽돌 한 장이다. 리더는 그 벽돌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정교한 설계도면을 가지고, 석공들과 벽돌들을 함께 쌓아 올리는 건축가다.
민주주의라는 의미를 지닌 영어단어 democracy는 고대 그리스어 ‘데모크라티아’demokratia라는 말에 유래했다. 이 단어는 ‘대중’을 의미하는 ‘데모’와 권력을 쥐고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크라티아’의 합성어다. 대중은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기에, 누군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잠정적인 ‘리더’를 선출해야한다. 이 선출과정이 ‘투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소위 ‘공정한’ 투표를 통해, 상대방보다 많은 표를 득표한 사람이 리더가 된다. 누가 많은 표를 가져갈 수 있는가? 그 문제는 명약관화하다. 투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인간은 결국 이기적인 동물이라고 정의한 진화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의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개인에게 양심이 있어도 대중에겐 양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타인의 희로애락을 자신의 희로애락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려는 ‘교육’을 수련하지 않는 한, 이기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이 타인과의 경정을 통해, 자신의 성공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게 만든다면, 그것은 교육이아니라 반인륜적인 타락이다.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 이종교배를 통해 합당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정권교체를 위한 시대의 사명이라고 떠들어댄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선진적인 인간과 그들이 공동체를 이루워 만드는 선진사회는 각가자 자신의 언행을 소신所信껏 표현한다. ‘소신’이란 감정에 휩싸이거나 외부의 영향을 받아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바탕대로, 자신이 원하는 자신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인 자기표현 방식이다. 그런 언행은 자신의 고유한 그리고 섬세한 생각으로부터 등장한다. 내가 평소에 생각을 훈련하지 않는다면, 의도하지 않는 언행을 일삼을 것이다. 내가 생각을 제어하고 완벽한 예술을 만들기 위해 조금씩 조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나 넘실거리는 감정이란 파도에서 어찌 할 바를 몰라 실수를 연발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 돌아볼 힘이 없어, 그런 실수를 인정하지도 않고 뉘우치지도 못한다.
인간은 ‘그 사람의 생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전도서> 23.7은 언제나 옳다. 사람은 그 사람이 평상시에 생각하는 수준이다. 그의 언행은 그 생각의 가감이 없는 표현이다. 생각은 자신의 생각이 적절한지 가만히 보려는 인내다. 혹은 생각이란 생각의 수준을 가름 하려는 수고다. ‘생각하다’라는 고대 히브리어 동사 ‘샤아르’는 ‘새로운 도시로 진입하여 신나는 삶을 시도하는 자신을 성문 위에서 가만히 응시하다’라는 뜻이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신을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관찰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어제보다 더 나은 존재로 진보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수정하기 위한 체계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이란 자신하고는 상관이 없는 정보를 수용하고 외우려는 욕심이 아니라, 자신을 평가하기 위한 외부의 점검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다. 인간의 수준은 그(녀) 자신의 선택이다. 어렸을 적에는 현재 자신의 쾌락을 자극하는 것들을 선호하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미래의 자신을 위해 발판이 되는 것을 시도하려고 노력한다. 보통 사람들은, 지금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하지만, 선택된 인간은, 미래 자신을 위해, 취사선택을 한다. 취사선택을 오랜 명상을 통한 자기수련의 결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남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책에서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III권에서 ‘습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신비한 그리스 단어로 설명한다. 바로 ‘프로하이레시스’προαίρεσις다. 이 단어는 흔히 ‘도덕적 개성; 의지; 선택; 의도’ 등으로 해석된다. 나는 이 단어를 ‘소신所信’으로 번역하고 싶다. ‘프로하이레시스’는 두 단어의 융합이다. ‘프로’와 ‘하이레시스’다. ‘프로’는 ‘-를 대신하여’ 혹은 ‘-전에’라는 의미다. ‘하이레시스’는 자기주관적인 선택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기신뢰를 통해 나온 선택이다. 이 선택만이 후회가 없고 옳다. 인간 사회는 운명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토의를 통해, 그 어중간한 중간을 ‘최선’이라고 착각한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한 사람에 대한 각주이며, 그리스도교는 예수 생각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이고, 이슬람은 무함마드 생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일 뿐이다. 인류의 진보는. 한 사람의 깊은 생각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이 바로 ‘하이레시스’다. ‘프로하이레시스’는 인간이 어떤 일을 선택할 때, 그것이 옳다면 반복하여 습관으로 만들기 위한 구별된 행위다. 프로하이레시스는 그 행위가가 신을 대신 하여, 혹은 미래에 자신이 흠모하는 자신을 대신하여, 파격적이며 독창적인 과감한 선택이다. 그것이 주위사람들에겐 종종 이단으로 비쳐질 수 있다.
소신의 소所자는 나무를 찍는 도끼가 들어있다. 내가 건축할 인생이란 집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마음 속에 깊이 숨어있는 신념이란 형상을 만들기 위해, 곁가지들을 힘차게 치는 행위가 소신이다. 오늘 그 소신을 발휘할 기회인 대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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