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8. (火曜日) “세 번째 실수: 복수復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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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 지류 부들>

2022.3.8. (火曜日) “세 번째 실수: 복수復讎”

그리스 비극 주인공이 세 번째 실수이자 파국은 ‘복수復讎’다. 복수는 흔히 ‘해를 당한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해를 그와 동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가해자에게 가하는 행위’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아는 복수의 개념은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 함무라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표현으로 상징되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기반으로 세상에 들어왔다. 복수동태법은 사실 정의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철퇴다.

함무라비 법전은 가로 2.15m, 세로 55cm 현무암에 서문, 282개 법조항, 그리고 결문으로 이루어진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 쐐기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함무라비는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건설하여, 도시를 하나로 묶는 질서를 제정하였다. 그는 ‘정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아카드어로 '정의'는 ‘미샤룸(mīšarum)’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규격’이다. 자신이 정한 원칙이 ‘정의’다. 함무라비법전 법 조항은 항상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지른 경우, 그 가해자에게 어떻게 하라”는 형식으로 쓰여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상했을 경우 바빌론 법정은 그 가해자의 눈을 상하게 만들었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치아를 부러뜨렸을 경우 그 가해자의 치아를 부러뜨렸다.

한국사에서 새로 등장한 리더는 유독 복수에 몰입되어있다. 항상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정의라는 이름으로 피의 복수를 감행해 오지 않았는가? 대선은 항상 양쪽 진영에 목숨을 내놓고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겨야할 결투 아니었는가!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이 그것을 찬성한다고 착각한다. 지금은 ‘합법’이라는 무시무시한 폭력이 폭력을 조장하는 줄 모르는 맹목과 실명의 상태다. 함무라비 법전의 동태복수법은 ‘정의’를 구현하는 좋은 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계급사회의 불평등을 기초한 ‘불의’였다. 바빌로니아는 다른 고대왕조가 그러하듯이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바빌론 사회의 상위 5%를 차지하는 왕과 귀족들은 아카드어로 ‘아윌룸(aīilum)’, 즉 ‘자유인’이라 불렸다. 지주였던 이들은 땅이나 돈을 빌려주는 부동산업과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부당이익을 취했다. 65% 정도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귀족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소작농으로 ‘무슈케눔(muškēnum)’이라 불렸다. 이들은 자신이 생산한 농산품 가운데 70% 이상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자유인으로부터 돈을 빌리면 터무니가 없는 이자로 항상 가난에 시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은 더 불행해졌다. 바빌로니아 사회의 나머지 30%는 노예다. 아카드어로 ‘와드둠(wardum)’이라 불렸다. 이들은 한때 소작농 신분이었다가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이다. 혹은 바빌로니아가 주변 국가와의 정복 전쟁을 통해 잡아온 포로들은 대부분 노예가 됐다.

함무라비 법전의 기본 틀인 동태복수법은 같은 계층 간에 적용되는 법이다. 다른 계층들 간에 사건이 발생하면 불평등 법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귀족이 노예의 한쪽 눈을 멀게 만들었을 경우 귀족은 노예에게 돈을 주면 해결되었지만, 만일 반대로 노예가 귀족의 눈을 멀게 만들었을 경우 그 노예는 사형을 당했다. 왕정체제의 법이란 왕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복수는 폭력을 동반하고, 그 폭력은 다른 폭력의 유발로 이어진다. 복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정의와 불의의 경계도 희미하게 만든다.

복수라는 행위를 가만히 응시해보자. 그 복수를 행하는 주체가, 피해를 당한 그 당사자가 아니다. 자신이 불의하게 당한 피해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는 강력한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바로 그를 사로잡은 ‘분노(憤怒)’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분노로 가득한 복수를 의인화하여 여신으로 섬겼다. 복수의 여신 이름은 ‘네메시스νεμεσις다. 네메시스 여신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신에게 맡겨진 운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벌한다.

분노의 여신 네메시스는 ‘오만’한 자를 벌한다. 오만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임무를 무시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 낭비하는 사람은 ‘오만’하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오만’하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는 고유하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하고, 남들과 경쟁 대상도 아니다. 자신이 그 임무를 찾아 최선을 다해 완수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고대 그리스어로 ‘오만’을 ‘휴브리스(hubris)’라 부른다. 휴브리스는 피해자에게 창피를 주고 욕보이는 행위다. 어떤 사람이 ‘오만’한 행위를 하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쾌락’을 자극하여 얻는 희열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만’을 피해자에게 창피를 주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가해자가 무슨 해를 당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런 폭력적인 행위로 ‘희열’을 느끼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오만’한 자는 자신의 미래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장님이 된다.

분노에 가득한 어린아이와 같은 자신이 넓은 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 내가 아닌 공동체와 심지어는 원수와 화해해야 하는 딜레마가 그를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라는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유아적인 순진함이 서서히 죽고, 다양한 경험을 수용하는 온전한 인간, 사회의 중요한 자신이 되는 시민으로 탄생한다. 복수라는 그리스 단어 ‘네메시스’는 ‘자신이 한 행동을 그대로 거두는 인과응보’라는 뜻이다.

나는 오만과 맹목으로 스스로 실명하여 생을 마감할 것인가? 아니면 감사와 안목으로, 매 순간 주위를 정색을 하고 생경하게 바라보면 감사할 것인가? 산책길 강가에서 본 부들이 부들부들떨며 나를 부른다. 강가로 내려가 순간을 영원하게 살며 살포시 떠는 부들을 보았다. 나도 부들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