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6. (日曜日) “첫 번째 실수: 오만傲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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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면 야산>

2022.3.6. (日曜日) “첫 번째 실수: 오만傲慢”

인생이란 무대에 올라, 대중에게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사람이, 자신의 배역을 찾지 못할 때,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인 ‘하마르티아’는 인간이 자신에게 범하는 가장 큰 죄다. 세상의 모든 죄와 범죄는 이 무식에서 출발한다. 그리스어 ‘하마르티아’가 지닌 다양한 의미가 신기하고도 필연적으로 히브리어 ‘하타’와 일치한다. ‘하타’는 히브리어로 ‘과녁을 빗나가다; 죄를 짓다’라는 의미다.

내가 나만의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 산은 등반가들이 모두 정복하고 싶은 네팔에 우뚝 솟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아니다. 그 산은 그 누구도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는, 저 하늘보다도 높고 더 태평양 심연보다고 깊은 곳이다. 그 산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궁극의 산’이다. 일찍이 이 산을 정복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 있다. 예수는 그 산을 사랑으로 정복하였다. 그 산의 이름은 골고다 언덕이었다. 무함마드는 그 산을 승복으로 정복하였다. 그 산의 이름은 히라동굴이다. 모세는 그 산을 자기신뢰와 깨달음으로 정복하였다. 그 산의 이름은 시내산 혹은 호렙산이다.

내가 아침이면 정색을 하고 오르는 산이 있다. 그 산은 1시간이면 정상까지 올라가는 뒷산이다. 일년내내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린다. 숲에 있는 나무들은 ‘좌정’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이 좌정한 지도 모르고 그렇게 앉아있다. 이 나무들이 옆에 있는 다른 나무에게 좌정하라고 가르치지는 법이 없다. 자신이 다른 나무들과 함께 조화로운 숲을 만들기 위해 침묵할 뿐이다. 나에게 이 산은 에베레스트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동안,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고 걷고 있다는 사실만 인식한다. 내가 걷는 동안, 심장박동수는 약간씩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코를 통해 들숨과 날숨을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바라본다. 겨울 내내 쌓인 낙엽으로 비탈길 오르기가 미끄럽지만, 한걸음은 내가 우주에서 처음 내딛는 장소이자 시간이기에 거룩하다. 그 한 걸음이 나의 인격이고 개성이다. 그 한 걸음이 나에게 에베레스트 산 정상이다.

아침 산책은 오늘을 어제의 반복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멀리서 나를 찾아온 귀한 손님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런 마음가짐을 통해 일깨움이 없다면, 오늘은 어제의 반복이고 올해는 작년의 반복이며, 이 삶은, 윤회를 신봉한다면, 이전 삶의 반복이다. 그런 반복이 진부腐腐다. 어제 옳은 것은 어제 옳다. 오늘 옳은 것은 정색을 하고 내가 정하면, 그것이 오늘 옳음이다. 그 옳음은 내일 다른 옳음을 통해 타도될 것이다. 어제 옳음을 내가 오늘도 진선미라고 우기는 행위가 진부다. 즉 고기는 썩기 마련이며, 그 철지난 부패腐敗한 고기를 오늘 사람들이게 진열陳列하는 행위처럼 어리석은 처사는 없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어제까지 획득한, 더욱이 타인이 부러워하는 그것이 아니다. 누가 나에게 자신이 거머쥔 권력을 자랑한다면, 나는 그에게 묻겠다. “당신의 걸음걸이를 보여주십시오. 그 걸음걸이가 푸틴과 같다면, 당신은 권력자가 아니라 권력이란 중독의 노예입니다.” 누가 나에게 자신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주식통장을 보여준다면, 나는 그에게 묻겠다. “오늘이 당신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다.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친구에게 감동적인 일을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핸드폰에서 누군가 만들어낸 숫자와 그래프를 보다가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시겠습니까?” 누가 나에게 자신의 지식을 자랑한다면,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삶은 잘 죽기 위한 예행연습입니다. 예수도, 소크라테스도, 붓다도 감동적인 죽음을 위해 인생을 달려왔습니다. 당신은 틱낫한처럼, 저 숲 속의 수많은 낙엽처럼, 고요하게 자신을 소멸하시겠습니까?”

남들이 우연히 부여한 권력, 부, 그리고 명예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몰염치沒廉恥가 오만傲慢이다. 그리스어로는 ‘휴브리스ὕβρις’다.오만한 자는 아무리 그가 시진핑, 푸틴, 혹은 김정은과 같은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기피대상이다. 신은 그대들이 아무것 아니었을 때,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리더도 뽑아주었지만, 그 권력을 국민을 위해, 민중을 위해, 인민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기 권력의 강화를 사용한다면, 그뿐만 아니라 그가 이끄는 공동체의 미래도 암울하다. 인생이란 무대 위에 올랐지만, 자신의 배역을 모르고 다른 사람의 배역을 탈취하여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처럼 처량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를 보는 모든 대중들을 그의 치명적인 약점을 알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자신을 돌아볼 줄 몰라 그가 이끄는 공동체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리스 비극시인 소포클레스는 비극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테베의 왕 크레온을 통해 오만을 보았다. 선왕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나지, 그의 시동생인 크레온이 왕이 된다. 그는 자신에게 굴러온 권력을 자신이 소유라고 착각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안티고네가 오빠 폴뤼니케스의 시신을 매장하려하자, 그 매장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린다. 권력초보자 크레온이 무시무시한 법이 기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불쌍한 시도다. 운명을 돌고 도는 수레바퀴다. 그런 의미에서 운명을 시간을 통해 만물을 공평하게 만든다. 오만의 반대말은 감사感謝다. 자신이 현재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가 그를 오만이란 늪에서 건져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지금 누리는 호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가? 인생이란 무대 위에 오른 내가 오만하다는 사실을 내 주위사람들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고 있지 않는가? 나는 두 눈을 뜨고 내 중심을 고요하게 바라보고 그 실상을 파악하고 있는가? 나는 저 무명의 소나무처럼, 좌정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