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5. (土曜日) “실수失手”

사진

<술 취한 사람들>

스페인 화가 호아킨 소로야Joaquín Sorolla (1863–1923)

1910, 유화, 115cm x 140 cm

런던 국립미술관

2022.3.5. (土曜日) “실수失手”

실수에는 ‘해도 되는 실수’와 ‘하지 말아야하는 실수’가 있다. ‘해도 되는 실수’는, 수정이 가능한 실수다.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싶은 열망을 지닌 간절한 사람의 시선은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다. 그(녀)는 하루를 마감하며, 깊은 밤에 자신의 골방으로 들어가,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과 행동을 복기한다. 이제 눈을 망원경이 아니라 현미경에 맞춘다. 그 현미경으로 자신의 하루를 샅샅이 들여다본다. 특히 타인 앞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고 싶어 만든 준비된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우연히 갑작스럽게 나온 언행을 일일이 기억해 내고 세심하게 살핀다. 자신이 의도한 언행이 아니라면, 깊이 땅을 치며 후회한다. 그 후회가 세상의 어떤 후회보다 슬플 때, 그는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되기 시작한다.

그런 된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변화를 추구한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새벽기상은, 100m라는 단거리를 준비하는 육상선수가 자신의 손과 발, 그리고 마음가짐을 출발선상에 가지런하게 놓고 심판관의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운동이다. 그는 하루를 일생처럼 살 것이다. 우리 모두 인생이란 항해에서 가야할 목적지가 있다. 그 목적지를 상기한다. 이제 그는 현미경이 아니라 망원경을 든다. 그 목적지가 육안에 들어오지 않지만, 망원경을 들고 초점을 맞출 때, 서서히 드러난다.

인생이란 무대에서 가장 큰 실수는, 무대에 올라왔지만, 자신의 맡은 배역을 모르는 것이다. 그 배역은 누구에게나 운명적 그리고 역사적이기도 하지만, 의지적 그리고 주관적이기도 하다. 내가 태어나 보니, 나의 성별, 국적 그리고 부모와 같인 외부 환경에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이 환경이 내가 인생이란 무대에서 맡은 배역을 결정하는데 배경이 되지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내가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성이나 다른 성적인 취향을 지닌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세계관을 경청하고 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나는 ‘남성주의 돼지’로 인생을 마칠 것이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국가들과 인생들의 역사, 문화 그리고 그들의 사상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나는 ‘국수민족주의자’로 남을 것이다. 내가 특정한 세계관을 지닌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의 세계관을 발판으로 다른 세계관을 공부하고 수용하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근친상간의 죄를 반복하여 결국 공동체에서 도태하고 말 것이다.

인간에게 ‘무식’이 있다면, 그것은 단막으로 진행되는 인생이란 무대에서 자신의 배역配役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배역을 모르는 사람이 주로 하는 습관이 있다. 타인의 배역을 부러워하며 일생을 산다. 자신이 지닌 현미경이나 망원경을 발굴하고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주변인간이나 유명인들에게 그 기기들을 조준하여 일거수일투족에 환호한다. 그런 환호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기猜忌로 변질된다. 인간은 부러움을 자신의 삶에 실현하지 못할 때, 그 대상을 자신과 다름으로 축하하지 못하고, 그가 불행해 지기를 바라는 악의를 품기 마련이다. 시기와 악의의 가장 큰 원인은, 그 사람의 시선이 타인에게 향해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 배역을 모르는 사람은, 타인들이 좋다는 배역이 자신에게도 어울린다고 착각한다. 그런 착각에서 나오는 언행이 ‘체’이고 ‘척’이다. 체하고 척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오히려 무시하고 조롱한다. 역지사지하는 공부와 수련이 부족하기 때문에, 타인과 타인의 세계관을 온전히 수용하고 인정할 수 없다. 자신의 깊이 응시하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다름을 틀림이 아니라 개성으로 축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수’는 철학, 민주, 문학, 그리고 종교의 근원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고대 그리스가 기원전 5세기 이전에 존재한 적이 없는 정체인 ‘민주주의’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투표’라는 공정체계를 창출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당시 아테네 자유일 남성에게만 국한되었지만, 일인일표를 보장하는 선거가 아테네를 선전사회를 탈바꿈하기 위해 시민교육이 필요했다. 귀족자체들만 가르치는 플라톤 ‘아카데미’와는 다른 시민전체의 정신과 영혼을 고양시키는 대중공연, 즉 ‘엔터테인먼트’를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경연이다.

그리스 극작가들인 시민들의 정신을 고양시킬 이야기를 비극공연형식으로 만들면서 무대에 올렸다. 그들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불행의 파국을 맞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이유는 한결같이, 자신이 누구인지모르는 무식과 그 무식에서 파생되는 행위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이 지닌 태생적이며 괴질적인 결함을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그리스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하마르티아는 궁술과 관련된 단어다. 궁수가 과녁에 화살을 명중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시위를 당길 충분한 힘이 없어서, 혹은 시위를 당겨도 궁극의 침묵을 유지하여 화살이 시위를 떠나게 만들 순간을 포착하지 못해서, 혹은 평상시에 시위를 충분히 당길 근육을 키우지 못한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항상 영웅이지만, 자신의 배역을 몰라,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다.

나는 과녁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시위를 충분히 당겨 화살이 어김없이 쏜살같이 달려갈 화살을 마련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