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3.(木曜日) ‘인과응보因果應報’(<요가수트라: 훈련경> 14행)

사진

<정원에 있는 여인Femme au jardin>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

유화, 1867, 82 cm x 100 cm

2022.3.3.(木曜日) ‘인과응보因果應報’(<요가수트라: 훈련경> 14행)

인간의 마음은 정원庭園과 같다. 인생이란 정원은, 내가 정성스럽게 가꿔 나에게 어울리는 천국으로 개조되던지, 아니면, 정원을 오랫동안 방치하여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쓸모없는 지옥이 되기도 한다. 나의 ‘의도적인 노력’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정원사가 자신의 땅을 개간하면서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잡초雜草를 제거하는 일이다. 그런 후, 자신이 선택한 씨앗을 파종播種하여 꽃이나 나무를 키운다. 마찬가지로, 인간 마음의 정원에, 쓸데없고 잘못 심겨지고 정결하지 못한 생각을 근절하고 자신이 원하는 옳고 유용하고 순견한 생각을 피우는 꽃과 나무를 길러야한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라는 말은 진리다. 콩을 심어놓고 팥을 기대하는 사람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음이다. 인류는 천체와 자연의 관찰을 통해, 우주를 지탱하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발견하고 감탄하고 그것을 과학, 철학, 그리고 종교로 표현하였다. 해와 달은 언제나 그 시간과 그 장소에서 뜨고 진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낮은 곳에서 다시 하늘로 올라 비를 내린다. 지상에 거주하는 식물과 동물과 보이지는 않지만 이 거대한 원칙을 거스릴 수 없다. 우주 자체가 인과응보가 만든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소중한 인생을 깊이 관찰하지 않고 하루하루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행운을 바라고 환경을 탓한다. 얄팍한 사람은 그 마음속에 오래전에 자리를 잡아, 그 사람인척하는 욕심의 노예가 되어, 욕심과 욕망이라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자신의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고 깊이 관찰하는 사람은, 자신이 간절히 희망하여 온 정성을 쏟은 일이 서서히 이루어지길 태연하게 바란다. 듬직한 사람은 결과는 원인이 낳은 당연하고 자연스런 식으로 여긴다. 그(녀)에게 인생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인과응보因果應報다.

듬직한 사람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도 그와 그의 위업偉業을 위해 태어났다. 그에겐 행운이 있을 수 없다. 당연한 것도 없다. 인생은 그에게 산수문제이며, 화학실험이다. 정해진 답이 있을 뿐이다. 저 하늘에 기러기 떼가 아무렇게나 나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확한 원칙에 의해 수치와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만일 이 인과응보의 법칙이 한 순간이라도 한 장소에서라도 깨진다면, 우주는 그 자리에서 무너질 것이다.

의심疑心은 인과응보에 대한 불신이다. 예수는 의심이 많은 도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그런 사람은 인생의 핵심을 이미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끊을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를 보려하지 않고 알려하지 않는다. 그의 일거 수 일투 족이 사실 그 사람의 인격이며 개성이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지표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그가 하는 행위가 그 사람이다. 그가 낯선 사람과 만나 말하는 태도, 얼굴 표정과 몸짓은 그 사람의 인생철학의 가감이 없는 표현이다.

그에게 다가온 행운과 불행은 예외가 아니라 가을에 열리는 과실과 같은 당연한 결과다. 인과응보는 언제나 어디서나 적용되는 삶의 원칙으로 예외도 없고 변칙도 없다. 이 원칙은 이름, 색도, 손이나 발도 없다. 미세한 것들 가운데 가장 미세하며, 거대한 것들 가운데 가장 거대하다. 귀가 없으나 모든 것을 경청하고 눈이 없으나 모든 것을 관찰하다. 발이 없으나 어디로든 가고 손이 없으나 무엇이나 잡는다.

고대 인도의 인과응보 개념은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를 통해, 그 핵심을 간파할 수 있다. ‘카르마’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런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는 별도로 존재한다. ‘크리야’kriya다. ‘카르마’는 행위를 유발시키는 원인이자. 행위가 끼치는 결과다. 즉 행위 배후에 있는 행위자의 의도다. 카르마는 행위이자 그 행위가 초래하는 반응이다. 카르마의 원칙은 7세기에 기록된 <브리하다란카야 우파니샤드>IV.4.5-6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자. 인간은 이것 혹은 저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행동하는 대로, 인간은 처신하는 대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선하게 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악하게 된다.

순결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순결하게 되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악하게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은 욕망으로 이우러져 있다.

욕망이 있는 곳에, 그의 의지가 있고,

그의 의지가 있는 곳에, 그의 행위가 있다.

그가 무슨 행위를 하던, 그는 그것을 추수할 것이다.”

카르마는 다음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그 행위의 당연한 결과이며, 다른 하나는, 그 결과가 그에 끼치는 영향이다. 행위의 당연한 결과를 산스크리트어로 ‘팔라’phala라고 부르고, 그 영향의 다양한 지속성을 ‘삼스카라’samskara라고 부른다. 삼스카라는 자연히 그 사람의 습관이 되어 개성과 인격이 된다. 고대 인도인들은 이 습관을 ‘바사다’vāsanā로 불렀다. 이 성향은 해탈을 경험하지 못한 중생이 그 다음 생애에도 반복하는 윤회saṃsāra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훈련경> 14행에서 인간이 현재의 삶에서 자신이 누구고 기쁨이나 당하고 있는 슬픔은 이전 삶이나 현재의 삶이라 할지라도 과거에 내가 행한 행위의 인과응보라고 말한다. 이 문구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지시대명사 ‘테’t는 <요가수트라: 훈련경> 13행에서 설명한 삶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들, 즉 태생, 생애, 그리고 일생의 경험을 이른다. 이런 것들은 내가 과거에 어떤 덕을 쌓았는지에 달려있다.

<요가수트라: 훈련경> 14행

ते ह्लाद परितापफलाः पुण्यापुण्यहेतुत्वात् ॥१४॥

te hlāda paritāpa-phalāḥ puṇya-apuṇya-hetutvāt ||14||

테 흘라다 파리타파-팔라흐 푼야-야푼야-헤투브바트

(직역)

“이것들은 덕이나 부덕에 의해 맺는 기쁨이나 고통의 열매다.”

(의역)

“<요가수트라: 훈련경> 13행에서 언급한 인간의 태생, 그(녀)의 생애, 그리고 생애의 경험은 그 전 생애나 그 전 삶에서 그가 덕을 쌓았느냐 혹은 부덕했느냐가 원인이 되어, 기쁨의 열매를 맺기도 하고 고통의 열매를 맺기도 한다.”

(어휘)

te 지시대명사 (m.pl.nom) ‘그것들’

hlāda 명사 (m.sg.nom) ‘기쁨’ (<hlād ‘즐거워하다’)

paritāpa 명사 (m.sg.nom) ‘고통; 슬픔’ (<pari- ‘주위’ + tap ‘뜨겁다’)

phalāḥ 명사 (m.pl.nom.) ‘열매들; 결과들’ (BV compound)

puṇya 명사 (n.sg) ‘공덕; 덕’ (<puṇ ‘선을 행하다’)

apuṇya 명사 (n.sg) ‘악덕’

hetutvāt 명사(m.sg.abl.) ‘-을 근거로;-이란 이유로’ (<hetu (<hi ‘자극하다’) + tva 추상형어미 (KD compound)

이 구절은 우주, 자연, 그리고 인생의 원칙들 간결하게 표현한다.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행복 혹은 당하고 있는 곤경이나 불행은, 모두 내가 과거에 저지른 행위의 당연한 결과이며 인과응보라는 죽비이며 깨달음이다. 여기에서 과거란, 어제까지 내가 저지른 언행이기도 하고, 영혼불멸사상에 근거한 윤회輪廻의 시점에서 보면, 이전 생애에서 나라는 존재가 이 땅에 새겨놓은 언행이다. 내가 태어난 태생, 나의 총체적인 삶, 그리고 그 인생 경험은, 이전 삶에서 내가 덕을 쌓았느냐 혹은 부덕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 삶은 기쁨일 수도 있고 고통일 수도 있다.

인간이 생전에 추구해야할 네 가지 삶의 원칙이 있다. 자신에게 할당된 고유한 임무를 찾아 몰입하는 ‘다르마’dharma, 자신의 삶에서 기쁨과 쾌락을 주는 행위를 즐기는 ‘카마’kama, 자신의 직업에서 성공을 달성하는 ‘아르타’artha, 그리고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진입하는 해탈인 ‘목샤’moksha다. 다르마는 자연과 인간 삶의 원칙이자 의무다. 다르마를 삶에 자연스럽게 적용하는 선이 ‘푼야puṇya’다. 인간은 자신의 다르마를 망각하거나 소홀히 여기면, 그는 부덕不德 혹은 악덕惡德을 쌓게 된다.

내 삶의 기쁨 혹은 슬픔은, 내가 이전에 쌓은 공덕이나 악덕의 자연스런 결과다. 현재의 기쁨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임무에 더욱 매진하여 덕을 쌓는 삶이다. 혹은 현재의 불행과 슬픔을 멈추고, 행복과 기쁨의 삶으로 전환하는 유일한 길이 있다.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고 내가 오늘 하려는 행위들이 나에게 어울리는 의무인지를 가만히 물어, 그것이 부덕하다면 당장 멈추는 용기다. 나는 오늘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할 것인가? 아니 나는 오늘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