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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러운 종교인들>
구스타프 도레 삽화, 단테 <신곡> 제7곡
2022.3,18(金曜日) “정도程度”
세상에 요구하는 군중의 삶을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군중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것이 삶의 형태가 반복되고 굳어지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군중이 원하는 삶을 흉내를 내는 로봇이 된다. 로봇robot이란 단어는 카렐 차펙(1890-1938)이란 체코의 극작가가 R.U.R. ("Rossum's Universal Robots”)의 영어번역에서 로봇robot이란 단어가 영어 어휘로 들어왔다. 이 단어는 고대 교회 슬라브어Old Church Slavonic에서 ‘노역’이란 의미를 지닌 ‘라보타’rabota에서 유래했다. 한마디로 나는 없어지고 로봇이 산다.
로봇이 된 군중이 사는 주변은 세상世上이 아니라 세속世俗이다. 세속은 계곡에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욕망에 물들어 그럭저럭 산다. 단테는 그런 세속적인 인간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개념을 이용하여 <신곡>에서 새롭게 소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을 ‘구분’이 아니라 ‘정도程度’로 설명하였다. 선과 악, 상과 하, 천국과 지옥, 남자와 여자와 같은 구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절묘絕妙한 순간에, 나에게 어울리는 궁극의 지점을 찾아 그것에 천착하는 삶이 최선이다.
정도에 중요한 시점은 그때 그때 다르다. 한자로 표현하지만 중中이 아니라 시중時中이다. 해와 달은, 매일 매일 다른 시간에 등장한다. ‘중’은 세상에 엄격한 기준이 있다고 억지를 부리며, 타인을 억압하려는 법, 교리, 규율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시중時中은 다르다. 산사에서 뉘엿뉘엿 지는 저녁놀을 바라보는 심정이다. 사실 어느 시점에 해가 지는지 알 수 없다. 사람마다, 해가 사라지는 순간을 다르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시중은, 그런 마음에서 나오는 ‘다른 것’에 대한 인정이며 관찰이다. 그러기에 그때 그때 어울리는 적당한 순간이 바로 시중이다. 시중을 마음에 품은 사람은, 스스로 절제하고, 타인이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판단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하고, 오히려 그 다름을 격려하고 기꺼이 즐거워한다.
단테는 <인페르노> 제7곡에서 탐욕과 방탕이란 세속에 물든 종교인들을 등장시킨다. 이들은 자신이 항상 옳은 ‘교리’를 지녔기에 중심이어야 악을 쓴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를 정죄하기 바쁘다. 단테는 14세기 자신이 피렌체에서 관찰했던 머리를 삭발하여 타인들에게 수도승이라고 자랑하던 수도사들, 추기경들, 그리고 교황을 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한 인물들로 묘사한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의 제4환으로 내려갔을 때, 그들은 서로 밀치며 끊임없이 싸우는 사제들을 본다. 단테에게 죄는 부족이거나 과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를 기초로 단테는 탐욕과 방탕의 죄를 지는 종교인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58 Mal dare e mal tener lo mondo pulcro
59 ha tolto loro, e posti a questa zuffa:
58. 그들은 잘못 주고, 잘못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아름다운 세계를
59. 빼앗아, 이 싸움터로 만들었습니다.
덕스러운 사람은 물질은 과도하지 않게 절제하면서 사용할 줄 안다. 덕스러운 중앙에 위치하면, 인색하지도 낭비하지도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덕스러운 사람은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패러다임 안에서 극단은 “mal dare” (방탕)과 “mal tener” (탐욕)이다. 단테의 덕스러운 삶은 이 극단의 정 가운데 있다. 그 원칙은 ben dare와 ben tener에 있다.
단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스러운 중용을 말하는 다른 이유는 ‘부의 경영’에 있다. 그것은 절제하는 물질적인 풍요에 대한 진정한 평가다. 단테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원칙은 당시 가톨릭교회의 프란체스카 수도들의 물질에 대한 경멸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오히려 당시 피렌체 귀족들은 ben dare를 통해, 자유스럼liberality와 관대함generosity을 실천하였다. 단테는 <프르가토리아> 8.129에서 말라스피나 가문을 찬양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갑을 영광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pregio de la borsa) 이른 아침은 하루를 살기 위해 절묘한 시중을 찾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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