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13. (日曜日) “영화 PIG과 자기축복自己祝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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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겔웨이 킨넬 (1927-2014)

2022.3.13. (日曜日) “영화 PIG과 자기축복自己祝福”

오랜만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나오는 영화를 보았다. Leaving Las Vegas 이후 내가 보고 싶은 케이지의 모습을 보질 못해 안타까웠다. 큰 기대를 가지고 Pig이란 영화를 보았다. 케이지 안에 있는 그의 본성이 조금 표현되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성공한 요리사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숲에서 향로버섯을 캐며 돼지 한 마리와 사는 이야기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으로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었다. 그 슬픔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돼지에 대한 보살핌과 사랑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이제 자신의 요리실력을 발휘하여, 돼지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영화를 만든 신인 감독과 작가가 이 영화의 모티브를 미국 시인 갤웨이 킨넬에서 찾은 것 같다. 갤웨이 킨넬(1927-2014)은 <성 프란체스코와 암퇘지>라는 시에서 암퇘지를 통해, 현대인들의 잃어버린 ‘자기축복自己祝福’을 노래한다. 축복은 신이나 영향력이 있는 윗사람이 나에게 강복하는 것이 아니다. 축복의 기원이자 근원이 바로 ‘나’다.

시인은 그 은유를 봄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죽었다고 여겼던 생명의 등장인 ‘봉오리’에서 찾았다. 봉오리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등장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이다. 그 봉오리는 싹을 더 티워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만개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아무도 모르게 저 산골짝에서 사라져갈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아름다움이란, 그 결과에 상관없이 생명을 약동시키려는 의지 자체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아름다움을 암퇘지를 통해 표현하였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외롭고 쓸쓸한 암퇘지가 새끼 돼지를 키우려는 열망이 숭고하다.

Saint Francis and the Sow 성 프란시스와 암퇘지

by Galway Kinnell (1927-2014)

겔웨이 킨넬

The bud

stands for all things,

even for those things that don’t flower,

for everything flowers, from within, of self-blessing;

봉오리는

만물을 위해 서 있습니다.

심지어 꽃을 피우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도.

왜냐하면 모든 것들은 내면으로부터 스스로를 축복하며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though sometimes it is necessary

to reteach a thing its loveliness,

to put a hand on its brow

of the flower

and retell it in words and in touch

it is lovely

until it flowers again from within, of self-blessing;

그러나 때때로 꽃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고,

그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다시 가르쳐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축복하며 꽃을 피울 때까지.

말로 손길로 그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다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인은 ‘봉오리’ 혹은 ‘싹’으로 번역되는 bud로 시를 시작한다. ‘버드’는 시작, 혹은 더 나아가 태초의 ‘무’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은 만물생성의 근원을 상징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들은 자신이 내포하고 있는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 봉우리를 이용한다. 그 봉오리는 운명에 따라 만개할 수도 있고 운명의 장난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과정도 역시 경이로운 자연의 섭리다. 인간은 그 봉우리가 만개의 가능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만일 우리들 중 누가 어떤 일을 시도하다가, 그것을 완수하지 못하면, 좌절한다. 혹은 타인은 그런 사람의 불행에 연민한다. 사람들은 부족한 것은 ‘자기축복’이다. 윌트 휘트먼이 외친대로 I celebrate myself and sing myself라고 외칠 수 있다. 우리는 자기-축복, 자기-사랑, 자기-신뢰를 통해 인생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이며 과정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주위 사람들에게 종종 그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훌륭한지를 말한다. 그들의 이마에 성호를 긋고 축복한다.

as Saint Francis

put his hand on the creased forehead

of the sow, and told her in words and in touch

blessings of earth on the sow, and the sow

began remembering all down her thick length,

from the earthen snout all the way

through the fodder and slops to the spiritual curl of the tail,

from the hard spininess spiked out from the spine

down through the great broken heart

to the sheer blue milken dreaminess spurting and shuddering

from the fourteen teats into the fourteen mouths sucking and blowing beneath them:

the long, perfect loveliness of sow.

성 프란체스코가 그랬습니다.

그는 암퇘지의 주름진 이마에 손을 얹어놓고

암퇘지에게 말과 손길로 땅의 축복을 빌었습니다. 암퇘지는

흙으로 지저분한 주둥이로부터

여물과 흙탕물로 가득한 된 몸을 거쳐 영적으로 말린 꼬리까지

자신의 육중한 몸 하나 하나를 기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등뼈로부터 삐쭉하게 튀어나온 딱딱한 가시부터

내려가 위대한 ‘부러진 심장’을 통해

단단한 척추로부터 삐쭉삐쭉 튀어나온 등어리부터,

그 아래 ‘크게 상처받은 심장’을 거쳐

온 몸을 떨며 젖을 만들어내는 완전한 푸른 젖통까지,

그 아래 열 네개의 젖꼭지를 물고 빠는 열네 마리의 새끼 입들까지;

그 길고도 완벽한 암퇘지의 사랑스러움을.

아시시의 성인, 프란체스코(1182-1226)는 맨발의 누더기를 걸친 성인이다. 그는 이 시에서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암퇘지의 이마에 성호를 긋는다. 그리고 암퇘지에게 ‘너는 이 땅의 축복이야’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암퇘지의 몸을 하나하나 인식하고 감상하고 칭찬하고 어루만져준다. 그러자 암퇘지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기억하기 시작한다. 몸이 흉측하게 두껍든, 주둥이에 흙이 잔뜩 뭍어있든, 심지어 말린 꼬리조차 신의 흔적을 알리는 영적인 상징이다.

성 프란체스코가 암퇘지를 사랑과 관심으로 만지듯이, 인간은 그 흔한 봉우리를 사랑과 관심으로 대한다면, 만물은 각자가 가치가 있는 신적인 존재들이다. 프란체스코가 화려한 옷을 벗고 숲으로 들어가 선교를 시작한다. 그의 첫 번째 선교대상은 새다. 그에게 복음은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에게도 전파되어야 할 소식이기 때문이다. 교황 이노센치오 3세가 그런 프란체스코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당시 교회권력들은 그를 ‘돼지하고나 어울릴 사람’이라고 나무랬다.

나는 스스로를 축복하는가? 주위존재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