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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11. (金曜日) “无无무무”

사진

<일본 간도 지방 사가이만>

일본 사진작가 히로시 스기모토Hiroshi Sugimoto (1948-)

1997, Gelatin silver print, 50.8 x 61 cm

뉴욕 만드리안 굿맨 미술관

2022.3.11. (金曜日) “无无무무”

우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일어나는 한없는 광장이다. 단테가 방문한 지옥에는 별이 없다. 그곳에는, 별의 움직임에 따른 시간의 변화와 그것에 순응하여 변모하는 만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창세기>1장에 신이 우주창조를 하기 위한 바탕으로 가장 먼저 시작한 작업이 ‘빛’이 상징하는 가능과 잠재를 만드는 일이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라고 신이 외쳤다. 이 빛은 우리가 흔히 아는 태양이나 달, 혹은 별들이 아니다. 그런 천체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이 빛은 다른 모든 창조물들이 등장할 수 있는 바탕이다.

장자는 이 원초적인 빛을 의인화하여 ‘광휘光輝’라고 불렀다. 광휘가 이제 우주창조를 위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태초에 등장한 혼돈인 ‘무유’无有, 혹은 ‘무무유无无有’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무의 본질을 터득시키는 질문으로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 단락 16에 등장한다.

光曜問乎无有曰

광요문호무유왈

(직역)

광요가 무유에서 물었다:

(의역)

만물의 존재를 만들기 위해 원초적인 현상이 등장해야하는데, 그것이 ‘광요’ 즉 빛이다. 빛이 작동하기 위해 혼돈상태인 ‘무유’에게 물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1.1-4와 유사하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말은 신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은 신적이다. 말이 태초에 신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를 통해 생겼다. 만물은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빛이 혼돈을 통해 우주를 창조하기 위한 첫 번째 행위가 질문이다. 질문을 통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夫子有乎其无有乎”

“부자유호 기무유호”

(직역)

“너는 있느냐, 혹은 없느냐?”

(의역)

빛은 질문을 통해 혼돈을 일깨워 질서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이 첫 질문은 ‘너는 있느냐? ’혹은 ‘너는 없느냐?’다. 질문하는 자는 질문을 통해 그 대상을 비활동에서 활동으로 전환시킨다. <창세기>에서 신이 인간에게 던진 첫 질문도 ‘네가 어이 있느냐?“다. 이 질문을 받은 대상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누구인지 일목요연하게 대답해야한다.

光曜不得問而孰視其狀貌

광요부득문이숙시기상모

(직역)

“광요는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어서, 그 모습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의역)

“혼돈은 창조이전의 상태로, 창조의 시발인 광요와 소통하는 방법을 몰라 침묵하였다. 광요는 더 이상 무유에게 질문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못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것은 그 대상을 천천히 바라보는 행위다.”

窅然空然

요연공연

(직역)

“심오하고 속이 텅 비었다.”

(의역)

“무유는 사방과 상하의 끝을 알 수 없어 아득하고, 그 안은 텅 비었다.”

(해설)

이 표현은 <창세기> 1장 2절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있다’라는 의미를 지닌 ‘토후 바-보후’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 특히 고대 이집트, 고왕국시대 도시 헤르모폴리스는 우주창조이전에 혼돈을 상징하는 8명의 신들이 선재했다고 기록한다. 이 신들은 그리스어로 ‘오그도아드’ὀγδοάς라고 부른다. 이들은 남녀 짝으로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원초적인 심연을 상징하는 누Nu와 나우네트Naunet, 무한을 상징하는 후Hu와 하우헤트Hauhet, 어둠을 상징하는 쿡Kuk과 카우케트Kauket, 그리고 감추어진 힘을 상징하는 아문Amun과 아마우네트Amaunet다.

終日視之而不見聽之而不聞搏之而不得也

종일시지이불견청지이불문박지이부득야

(직역)

‘온종일 무유를 쳐다보아도, 볼 수가 없고, 귀를 기울려도 들이지 않고,

손으로 잡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

(의역)

“온종일, 무유라는 혼돈을 바라보았지만, 눈으로 볼 수가 없었고 귀를 기울여 경청하였지만, 귀로 들을 수 없었고, 손으로 잡으려 해도 도저히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해석)

만물의 기반이 되는 무유의 경지는 인간의 오감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 경지는 마치 수련과정을 통해 소수만 진입할 수 있는 경내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장자의 말과 유사한 말을 <마가복음> 8.18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무유는 우주탄생의 모체이기 때문에 도저히 가름할 수 없는 대상이다.

光曜曰至矣其孰能至此乎

광요왈지의기숙능지차호

(직역)

광요가 말했다. “이야말로 지극한 경지구나! 과연 누가 그 경지에 도달 할 수 있겠는가?”

(의역)

빛이 말했다. “그 경지는 누구도 가보지 않는 지극한 경지구나. 그 경지에 도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석)

빛의 자조적인 외침은, 성서에 등장하는 고통을 받는 의인인 욥의 고백과 유사하다. 욥은 자신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신은 욥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내가 이 땅의 기초를 세웠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욥기> 38.3)

予能有无矣​而未能无无

여능유무의이미능무무야

(직역)

나는 지금까지 무의 경지가 있음을 알았지만, 무도 없는, 무무無無의 경지를 몰랐다.

(의역)

나는 지금까지 무의 경지를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경험하는 유의 경지에 대한 부정으로 무를 상상하여 그 존재를 간접적으로 상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무조차 존재하지 않는 무무의 경지를 가름할 수 없다. 무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유와 상반된 개념이다. 다른 하나는, ‘유무有無’라는 표현에서와 같이 유의 반대개념으로서의 무가 아니라, 무조차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인 ‘무무無無’다.

及為无有矣何從至此哉

급위무유의가종지차재

(직역)

무도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어떻게 그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는가!

(의역)

나와 같이 유무의 경지에서 살고 있는 자가, 무무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장자는 위 문장에서만 ‘무무无无’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무무’는 노자가 <도덕경> 25장에서 사용한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도道’와 다르다. 가름할 수 없는 무한한 바다 사진을 찍은 수기모토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바다를 담을 수 없지만, 그것을 담으려는 인간의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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