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10. (木曜日) “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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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기 시작한 청평 호수>

2022.3.10. (木曜日) “无무”

매주 목요일은 유튜브에 <수요묵상>이란 이름으로 올리는 동영상 촬영하는 날이다. 작년 4월 부활절에 시작하였고 오늘이 1년이 되는 날이다. 코로나 시대, 성서를 깊이 읽고, 그 내용을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시작하였다. 나는 그 주일에 봉독한 세계교회가 정한 신구약에서 발췌한 성경구절들 가운데, 한 구절을 선택한다. 그런 후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기록된 원문들 가운데, 마음을 끄는 구절 하나를 암기하기 시작한다. 원문암기는 나에게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의미를 알려준다. 그러면 나는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더코라’ 채플에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내용을 전달해왔다.

2022년 4월부터는 <수요묵상>이라는 이름으로 성서구절이 아니라, <도마복음서> 어록 114개를, 일주일에 하나씩 향후 2년 동안 영상에 담아 보기로 결정하였다. <도마복음서>는 신약성서의 복음서가 전달하지 못한 예수의 특별한 사상을 담고 있다. <도마복음서>는 아직 복음서가 정경으로 수용되기전, 특히 삼위일체가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간으로 자리잡기 전, 1-2세기 팔레스타인의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담고 있다. 촬영도 <도마복음서>가 기록된 고대 이집트어의 마지막 단계인 콥트어 원문을 가만히 암송하여, 그 깨달음 바를 전달하고 싶다. 그 내용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과 무엇이 유사하고 상이한지를 전달하고 싶다.

지금까지 수요묵상 렉셔너리는 검은 의자에 앉아 가만히 전달하였지만, 수요묵상 <도마복음서>는 칠판을 놓고 자세한 설명을 시도할 것이다. 경전의 원문을 다루면서, 그 본문과 관련된 ‘동서고금의’ 경전들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설명할 것이다. 특히 오랫동안 흠모하던 <장자>와 노자의 <도덕경>을 공부하여 함께 소개하고 싶다.

며칠 전 <창세기> 1장 2절에 등장하는 ‘혼돈’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문구인 ‘호후 바보후’tohu va-bohu를 묵상하면서, 빅뱅이전의 상태인 ‘없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장자의 <외편> 제12장 9단락에서 찾았다. 우주창조이전의 ‘없음’을 인간의 언어라는 ‘있음’으로 해석해야하는 모순에 봉착하지만, 그 없음의 상태를 알려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도리이자 최선이다. 제12장은 소위 도가철학의 우주론을 담고 있다. 천하는 다스리는 일은,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서 저지르는 조그만 생각과 행위에 대한 관찰과 정리에서 시작한다. <내편>에서는 볼 수 없는 심오한 내용이다. 다음은 장자 <외편> 제12장 9단락 전반부의 원문, 직역, 그리고 의역이다.

泰初有无无有无名

태초유무무유무명

(직역)

태초에 ‘없음’만 있었다. 있음도 없었고 이름도 없었다.

(의역)

우주의 처음인 맨 처음, 태초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라는 것을 개념적으로 상정할 수밖에 없다. 무는 있음을 상징하는 ‘유’의 상대적이며 반대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유무라는 개념조차 등장하지 않는 알 수 없는 상태다. 우리가 말로 알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一之所起有一而未形

일지소기유일이미형

(직역)

여기에서 하나가 생겼다. 하나는 있어도 형태는 아직 없었다.

(의역)

태초에 생겨난 ‘없음’은 단수와 복수, 이것과 저것, 위와 아래, 겉과 속의 구분이 되지 않은 일체다. 그 하나는 만물에 각자에게 맞는 본성을 갖추게 만드는 원칙이다. 만물이 존재하기 위해서 취득해야할 특징인 ‘형태’이 아직 생겨나지 않는 상태다.

物得以生謂之德

물들이생위지덕

(직역)

만물은 하나를 얻고 생겨나, 이를 덕이라 부른다.

(의역)

만물은 하나인 ‘무’를 통해 생겨났다. ‘무’를 통해 만물의 본성으로 각자에게 부여된 특성을 ‘덕’이라 부른다. 만물에게 깃든, 만물을 그것답게, 혹은 만물을 그 생애동안 그것이 되게 만드는 됨됨이가 덕이다.

未形者有分

미형자유분

(직역)

아직 형태가 없지만, 구분이 생겼다.

(의역)

만물이 하나의 상태, 즉 무로 존재하다가, 그 안에서 구분이 생겼다.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개성이고, 이것과 저것의 다름이 상대방에 대한 경외이며 존중이다. 만물은 하나가 분화하여 둘과 셋이 되면서 우주가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구분이 생겨, 자신이 본디 있어야할 자리에 가만히 있는 찬연粲然이다.

且然無閒謂之命

차연무한위지명

(직역)

또한 그렇게 되어, 틈도 없다. 이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의역)

하나 안에서 구분이 생겨난 후에, 우주와 자연이 생겨났다. 우주와 자연은 원래 하나였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본성인 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미움과 다툼과 같은 틈이 존재하지 않는 혼연渾然이다. 이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장자는 태풍과 같은 붓을 들고 우주 처음의 모습을 하늘에 써내려갔다. 그의 만물 처음에 대한 글을 보고 나는 다음을 추정해 보았다.

첫째, 장자는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의 그 무엇을 ‘무’ 즉 ‘없음’이라고 지칭하였다. 그 없음은 ‘유’의 반대말이 아니라, 인도경전 <리그베다> 10권 129곡 만달라에 등장하는 ‘존재sat’도 없고 ‘비존재’asat도 없는 원초적인 혼돈으로의 ‘무’다. 이 무를 정의하라면, 첫 구절에 ‘무’자를 삽입하여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泰初有无无有无名(태초유무무유무명), 즉 ‘태초에는 없음만 있었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구분도 없었고, 개별 사물에 대한 이름도 없었다.”

둘째, 원초적인 ‘무’로서의 혼돈엔, 그것을 마땅하게 부른 용어, 즉 이름이 없었다. 장자가 태초의 상태를 이름이 아직 불리지 않았다고 깨달은 바는, 이미 바빌로니아의 창조신화라고 알려진 <에누마엘리시>의 제1토판 1행과 2행에서 이렇게 말한다: “높은 곳에서는 하늘이 불리지 않았고, 아래에서는 땅에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을 때.” 무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셋째, 무로부터 첫 번째 등장하는 것은 ‘하나’다. 하나는 크기가 무한하여 한 눈에 감히 가름할 수 없는 태극太極이다. 그러기에 하나는 어떤 모양이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장자는 태극인 무를 아직 형태를 갖추기 전 상태로 설명하였다.

넷째, 무로서의 ‘하나’는 후에 등장한 유일신 종교에서 등장한 유일신이나 플로티누스 철학에서 등장한 제 일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물을 생성하게 만들 우주의 자궁으로서의 수용체다. 그것은 우주를 탄생시킬 가능성이자 잠재성이다. 어떤 외형적인 표시를 담고 있지 않는 우주탄생의 비밀을 머금고 있는 씨앗이며 장가가 말하는 ‘도道’다. 이 도를 <요한복음> 저자는 그리스 철학 용어를 빌려 ‘로고스logos’라고 불렀다.

다섯 번째, 만물은 ‘하나’라는 가능성과 잠재력의 씨앗을 통해 등장하였다. 그 만물을 하나로부터 물려받는 본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이 ‘덕’이다. 그는 ‘자기나름’이다. 야산에 떨어진 낙엽의 생김새가 모두 다르듯이, 세상에 태어난 어린아이가 쌍둥이라고 생김새가 다르듯이, 만물은 저마다,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그것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것이 바로 ‘덕’이다. 인간에게 행복이란 자신만의 덕을 찾는 구별된 여정이다. 행태가 겉 모습이라면 덕은 속 모습이다.

여섯 번째, 만물이 태어나 이름을 획득하고 형태를 갖춘다. 장자는 이 과정을 ‘유분有分’이라고 불렀다. 유분의 자신의 목숨이자 몫이다.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여 스스로 찬란하게 빛을 내는 찬연粲然의 모습이다. 찬연한 자는 자연과 사람들과 덕을 발휘하면서 하나를 이룬다. 이 하나가 되는 과정인 혼연일체渾然一體다. 1인칭과 1인칭, 1인칭과 3인칭의 구분이 없어지는 무한無閒의 상태가 나의 목숨이며 운명이다.

장자가 이 무를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그러던 중, 오늘 오후 집 앞 청평호수 천재개벽하는 소리를 낸다. 쿵쿵쾅쾅. 겨울 내내 얼었던 호수를 풀기 시작하였다. 무엇이 이 견고한 얼음을 물로 변화시켰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