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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
2022.2.6. (日曜日) “산만散漫”
아침에 일어나자, 바로 1층 공부방에 마련된 하얀 방석 위로 올라간다. 무함마드가 한 순간에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타고 갔다는 백마 부락Buraq과 같은 나의 카페트다. 그리고 겨우 떴던 눈을 다시 감는다. 이 자기응시를 연습하지 않으며, 그 날은 대개 산만散漫하게 흘러간다. 하루가 인생이고 인생이 하루라고 여러 번 말해왔지만, 정작 하루라는 시간과 대결에서 이긴 적이 거의 없다. 대개 허투루 하루를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밤새 감았던 눈을, 다시 감아, 이 아침에 생명이 부지했음을 확인하고 신에게 감사하고 눈을 떳을 때, 봐야만 하는 것을 깊이 보겠다는 마음챙김이다.
파탄잘리가 <요가수트라>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마음(citta)은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출렁이라는 잔물결(vritti)와 같다. 마음의 요동은 나 삶 전체의 요동이다. 그런 발견은 역설적으로 고요한 마음을 획득하기 위한 첫 발음이다. 고요는 자신만의 노래를 몰입해서 부를 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아우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은 자신의 무덤 비문에서, 고요를 ‘시야팀’shiyatim이라는 고대 페르시아 단어로 표현하였다. ‘시야팀’의 또 다른 의미는 환희다. 이 고요만이 삶의 기쁨이다.
르네상스의 주역인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는 366편으로 이루어진 <일 깐쪼니에레>의 첫 곡을 ‘흩어진 시구에서 소리를 듣는 당신들Voi ch’ascoltate in rime sparse’이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는 이 노래를 젊은 시절 그가 사랑했던 여인 라우라가 죽은 이후(1348년) 기록했을 것이다. 그가 굳이 이 구절을 맨 앞에 위치한 이유는, 젊은 시절, 정욕에 의존한 사랑이 가져왔던 폭력과 실수error를 관조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가 라우라에 대한 사랑을 근거로 시를 쓰기 시작하였지만, 정신적이며 영적인 사랑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인간의 감정처럼 금방 사라질 수밖에 없는 허망이다. 그는 이제 정욕과 사랑을 구분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그는 신이 어머니를 통해 선물해 주었던 사랑을 다시 획득하려고 시도한다. 그것이 바로 회심回心이다.
이 시의 전통적인 사행시quatrain 두 소절로 이루어진 8행과 파격적인 삼행시triplet 두 소절로 구성되었다. 이 시는 2인칭 복수(Voi ch'ascoltate)로 시작하여 1인칭 단수 (spero trovar pietà, nonché perdono)로 마친다. 그는 시인으로 자신이 젊은 시절 저지른 잘못에 연민과 용서를 독자들에게 간구한다. 그는 젊은 시절 사랑이 허상이고 실수였다고 고백한다. 이 2인칭 복수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이면서 인류를 의미한다. 페트라르카는 이어 삼행으로 이루어진 두 소절에서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한다. 풋사랑을 경험한 후에, 사랑을 다시 해석하고 용서를 구한다. 타인에게 의존해 기뻐하고 슬퍼한 사랑을 자신에게도 돌리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다. 그가 굳이 그리스도교에서 완벽을 의미하는 숫자인 3을 이용하여, 회심하고 각성한다. 다음은 이 시의 첫 두 단락 원문과 번역이다:
1. Voi ch’ascoltate in rime sparse il suono
2. di quei sospiri ond’io nudriva ’l core
3. in sul mio primo giovenile errore
4. quand’era in parte altr’uom da quel ch’i’ sono,
(번역)
1. 이 흩어진 시구 안에서
2. 심장에 자양분을 주었던 한숨 소리를 들었던 당신들!
4. 그 때는 현재의 저와 부분적으로 다른 인간이었던 시절인
3. 제 첫 번째 방황하던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5. del vario stile in ch’io piango et ragiono
6. fra le vane speranze e ’l van dolore,
7. ove sia chi per prova intenda amore,
8. spero trovar pietà, nonché perdono.
(번역)
5. 다양한 문체로
6. 헛된 꿈과 헛된 고통 사이에서 저는 울고 생각합니다.
7. 삶의 경험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 안에서
8. 이제 저는 연민뿐만 아니라 용서도 발견하고 싶습니다.
1행에 등장하는 ‘시구rime’란 페르라르카는 ‘시’를 상징하기 위해 사용한 환유metonymy다. ‘흩어진sparse’이란 단어는 의성어로 표현방식이며, 그의 ‘한숨 소리’il suono di quei sospiri는 라우라를 사랑을 나누면서 나눈 격정적인 소리에 대한 은유다. 페트라크카는 그 격정적인 사랑이 젊은 시절 자신의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자양분이었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이내 그는 현재의 자신은 젊은 시절 자신과 다르다고 말한다. 일부는 유사하지만, 대부분은 다른 인간으로 변형-변화되어 다른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젊은 시절을 한마디로 ‘첫 번째 방황하던 젊은 시절in sul mio primo giovenile errore’라고 말한다.
페르카르카는 5행에서 자신이 젊은 시절 시도했던 ‘다양한 문체로 사랑 때문에 울고 생각했다del vario stile in ch’io piango et ragiono’고 고백한다. 그가 이 시에서 실제로 다양한 문체를 사용한다. 366개 시중, 317개가 14행으로 구성된 소네트sonnet, 29개가 대중 가요인 칸초네canzone, 9개의 운율은 없지만 6행으로 이루어진 세스티네sestine, 4개의 북이탈리아에서 불린 세속 성악곡인 미르리갈midrigal, 그리고 7개의 AbbaA형식으로 이루어진 노래인 발라타ballata로 구성되어있다. 그는 자신의 지적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만든 젊은 시절의 시들을 ‘헛된 꿈과 헛된 고통 사이에서 울고 생각하였다’라고 평가한다. 라우라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일방적이며, 그래서 폭력적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관계를 희망하는 헛된 꿈이었고, 그것이 상호간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이었다. 그날그날 감정의 변화에 따라 마음대로 시를 쓴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그는 이제 달라졌다. 삶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사랑은, 일방적이 상호적이어야 하며, 자기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상대방 감정에 대한 관찰이며, 자기 욕망의 표현이 아니라, 상대방의 바람을 경청하고 배려하는 과정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경험을 통해 얻은 두 가지 가치가 있다. 연민과 용서다. 그는 이 새로운 사랑을 통해 ‘연민’뿐만 아니라 ‘용서’를 실천하길 바란다.
연민憐憫pietà이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용기이자 결심이며, 그런 사랑이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기적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사랑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어머니의 사랑이 이 연민이다. 용서容恕perdono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아량이다. 이 용서라는 덕목도, 어머니는 모든 인간들에게 가르쳤다. 인간은, 어머니의 연민과 용서가 만들어 낼 예술작품이다. 아이가 점점 커다며, 학교에서 자신과의 경쟁이 아니라 타인과의 경쟁으로 내몰리면서, 점점 이기적인 동물로 변한다. 페트라르카는 이제 이 연민과 용서를 자신의 삶에서 찾기를 희망한다.
페트라트카는 삼행으로 이루어진 다음 싯구에서 변화된 자신을 노래한다:
9. Ma ben veggio or sì come al popol tutto
10. favola fui gran tempo, onde sovente
11. di me medesmo meco mi vergogno;
9. 그러나 지금 저는 오랜 기간 동안
10.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이야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1. 그것이 저를 종종 수치심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12. et del mio vaneggiar vergogna è ’l frutto,
13. e ’l pentersi, e ’l conoscer chiaramente
14. che quanto piace al mondo è breve sogno.
12. 저의 걷잡을 수 없는 허영과 수치의 열매로 부터
13. 회개하고 선명하게 세상을 인식합니다.
14. 세상이 주는 기쁨은 덧없는 꿈입니다.
시인은 이 사랑을 깨닫기까지, 연민과 용서가 삶의 기반이란 사실을 실감하기 전까지, 그는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에머슨이 지적한 대로, 영적인 인간은, 적절한 시간이 되면, 자신을 가만히 돌아본다. 인간은 삶의 일정한 순간에 외부로 향한 귀와 눈을 자신 내부로 돌린다. 그 내부 자신이 그렇게도 찾고 싶었던 천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시선의 변화를 통해, 그는 이제 깨닫는다. 너무 오랫동안 타인이 말하는 ‘이야기favolo’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타인이 평가하는 ‘그’와 자신이 되고 싶은 ‘그’를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제 그런 인기에 영합한 꼭두각시와 같은 삶을 창피하게 여긴다.
시인은 비로서 자신을 응시한다. 자신의 눈으로 그 자신을 생경하게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허영을 추구하는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고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회심하고 자신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기쁨은 덧없는 꿈이라고 노래한다. 솔로몬이 인생말년에 깨달은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깨달음과 유사하다. 나는 산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내면에 귀를 기울여, 회심하고 세상을 선명하게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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