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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탕한 아들의 귀환>
렘브란트 (1606-1669)
Title: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에칭, 1636, 15.6cm × 13.8cm
2022.2.4. (金曜日) “머나먼 코라chora”
(사순절 네 번째주 렉셔너리, Year C, March 27th, 2022)
(*1월29일 매일묵상 글에서, 대선을 40일 앞두고 ‘누가 대통령이 될만한가’라는 글을 40일동안 올리기로 약속했습니다. 어제 밤, 성경을 깊이 읽으면서 그리스도교 사순절 기간과 겹쳤다는 사실을 상기하였습니다. 대선에 관련된 글을, 다시 토론이 있을 때, 올리기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여러분에게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우리 각자가 마음을 개간하는 위대한 개인이 되는 것이, 선진조국을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방탕한 아들의 귀환>에 관한 묵상의 글입니다)
인간이 자신을 가만히 관찰하고 점검하는 습관을 수련하면,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 수련을 시작한다. 그 수련은 구별된 생각과 말뿐만 아니라 반드시 신체를 통한 행위도 나타난다. 우리는 얼마나 말만하는 사람들에게 경도되었는가? 그런 수련이 정착되어, 그 사람의 구별된 습관이 되면, 그는 이미 새로운 인간, 새로운 피조물이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기뻐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교에서 사순절四旬節은 그런 과거를 유기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영적인 수련 기간이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에 할당된 복음서는 <누가복음> 15장 후반에 등장하는 소위 ‘돌아온 탕자’이야기다. ‘돌아오다’라는 말뜻이,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온다는 의미다. 인간은 자신이 있는 이 장소, 즉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줄 모른다. 타인이 부러워하는 돈, 권력, 명예를 한참 추구하다, 인생의 어려움에 봉착하여, 그런 것들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란 사실을 알고, 자신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인생에서 가장 일상적인 것은, 바로 ‘자기-자신’이다. 자신이 무심코 하는 생각, 말, 그리고 혼자 있을 때, 하는 행위가 정말 귀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인간은 역경을 통해, 이 평범한 진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시험과 역경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에서 ‘그의 전진을 방해하고 길을 막는 장애물이 오히려 유일한 길이다’라고 선언한다.
예수는 그 일상으로 돌아오는, 영적으로 회심하는 이야기를 ‘두 아들 이야기’를 통해 전달한다.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다. 이 탕자의 비유는 <누가복음> 15장 11절-12절에서 이렇게 시작한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그들 중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 제게 속한 재산의 몫을 나에게 주십시오.’”
이 문장에서 ‘재산의 몫’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메로스 테스 우시아스’μέρος τῆς οὐσίας다. ‘몫’에 해당하는 그리스 단어 ‘메로스’는 둘째 아들이 당연히 소유해야 할 인생의 몫이다. 그 몫은 아버지의 소유가 아니라, 둘째 아들이 자신의 삶 안에서 싹을 틔우고 가꾸여 열매를 맺어야 할 그의 고유한 업이다.
‘메로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나할라 הנחלה’다. ‘나할라’는 구약성서 <열왕기상> 21장에 등장하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도 등장하듯이,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한 개인의 고유한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고대이집트의 마아트maat, 수메르의 메me, 산스크리트의 카르마karma, 동양의 명命이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도 않고 그의 몫을 나눠주었다. 인간의 몫은 그(녀)의 목숨이다. 그 몫은 아버지의 소유도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몫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찾고 개척하기 위해 머나먼 지방으로 떠난다. <누가복음> 15장 13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καὶ μετ’ οὐ πολλὰς ἡμέρας συναγαγὼν πάντα
ὁ νεώτερος υἱὸς ἀπεδήμησεν εἰς χώραν μακράν,
καὶ ἐκεῖ διεσκόρπισεν τὴν οὐσίαν αὐτοῦ ζῶν ἀσώτως.
카이 메투 폴라스 헤메라스 쉬나가곤 판타
호 네오테로스 휘오스 아페데메센 에이스 코란 마크란,
카이 에케이 디에스코르피센 텐 우시안 아우투 쫀 아소토스
“며칠 후, 작은 아들이 모든 재산을 모아 ‘머나먼 코라’로 떠났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방탕하게 낭비하였다.”
<누가복음> 15.13
작은 아들이 간 곳은, 환락의 도시가 아니라 자신이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공간, 즉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공간이다. 위 문장에서 ‘먼 지방’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문구는 ‘에이스 코란 마크란εἰς χώραν μακράν’이다. ‘코라’라는 그리스 단어는 야생과 질서, 사막과 도시 사이에 존재하는 애매한 공간이다. 플라톤은 우주의 생성과정을 기록한 <타마이우스>에서 코라를 언급하면서, 혼돈이란 무를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질서로 탈바꿈하기 위한 공간과 시간을 ‘코라’라고 불렀다. 그 공간을 생물에게 적용시키자면, 어머니의 자궁이다.
코라는 현재 나에게 익숙한 공간으로부터 아득하게 떨어진 공간이다. 그래서 <누가복음> 저자는 형용사 ‘마크란’을 사용하였다. ‘마크란’을 더 이상 멀 수 없는 한계의 장소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제 1토판 9행엔 이 서사시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카드어로 기록된 원문은 다음과 같다. 다음은 아카드어 음역과 번역이다.
urḫa rūqta illikam-ma aniḫ u šupšuḫ
우르하 루끄타 일리캄-마 아니흐 우 슙슈흐
“그가 먼 길을 떠나, 그 후에 지쳤지만, 오히려 새 힘을 얻었다.”
<길가메시 서사시> 제1토판 9행
작은아들은 이 머나먼 땅에서 모든 것을 소진한다. 과거에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을 모두 잃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원래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돼지 밥을 훔쳐 먹는 비참한 존재로 추락하였다. 그 추락의 순간은 작은 아들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총성이 되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아버지 집에서 누리던 일상이 복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도 돌아간다. 그는 돌아가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할 것이다.
작은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15장 21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Πάτερ, ἥμαρτον εἰς τὸν οὐρανὸν καὶ ἐνώπιόν σου,
파테르 헤마르톤 에이스 톤 우라논 카이 에노피온 수
“아버지, 제가 하늘과 당신께서 보시기에 죄를 지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1절
위 문장에서 ‘죄를 짓다’란 뜻의 그리스 단어는 ‘하마르타노’다. ‘하마르타노’의 원래 의미는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을 무시하고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헤매다; 길을 잃다’라는 의미다. 인생에서 죄는 자신에 맡겨진 고유한 임무를 모르는 무식이며, 그 임무를 알더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는 게으름이다.
어떻게 우리가 죄를 짓이 않을 수 있을까? <누가복음> 15장 22절에 그 힌트가 담겨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다음과 같이 주문한다. “어서, 가장 훌륭한 의복을 가져다 입히고, 손가 반지를 끼우고, 새 신발을 신켜라!”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는 표징은, 단순히 생각이나 말이 아니다. 그 사람의 몸, 손, 그리고 발의 움직임에서 드러나야 한다.
사순절은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심오하게 보는 계절이다. 자신의 손으로 무엇을 하는지 제어하는 시간이다. 자신의 발이 어디를 향하는지 관찰하는 기간이다. 당신은 몸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소중하게 단련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손은 구별된 임무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당신은 가야 할 곳으로 발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사순절은 우리의 몸, 손, 그리고 발이 어디로 가는지 조용히 점검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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