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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봉 야산 이끼>
2022.2.27. (日曜日)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어제 (2022.2.26.) 이어령선생님께서 소천하셨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중에 하나가 신선하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며, 배고플까 봐, 저 멀리서 어머니가 부르신다.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어머니는 걱정이 많다. 배고픈지도 모르고 노는 나를 측은하게 여겨, 밥 먹고 다시 힘을 얻어, 날이 밝으면 다시 친구들과 즐겁게 놀라는 사랑이다. 이 말엔 인간이란 동물이 깨달은 최선의 덕인 사랑이 담겨있고, 죽음은 다음 생을 준비하기 위해 휴식이라는 아련하지만 대담한 마음이 담겨있다.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선 어머니 자궁에 있어야 하듯이, 인간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다음 삶엔 그 인간이 인간이란 동물로 태어날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소나무로 태어날지, 혹은 아침 산책마다 보는 고라니로 태어날지, 혹은 오늘 아침에 발견한 낙엽속에 물끄러미 고개를 내민 바위위 이끼로 태어날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고유한 임무를 찾아 몰입하면, 그 몰입이 바로 영생으로 이어진다. 이어령 선생님의 말은 수피시인 루미의 말을 상기시킨다. 선생님을 기리며, 수피 시인 루미(1207-1273)이 쓴 두 편의 시를 번역해 보았다. 첫 번째 시는 <내가 죽던 날>이다.
On the day I die
Rumi
On the day I die, when I'm being carried
toward the grave, don't weep. Don't say,
제가 죽는 날, 제가
무덤으로 옮겨질 때, 울지 마세요. 말하지 마세요.
He's gone! He's gone. Death has nothing
to do with going away. The sun sets and
그가 떠났다고. 그가 떠났다고. 죽음은
떠나는 것과 상관없습니다. 태양이 지고
the moon sets, but they're not gone.
Death is a coming together. The tomb
달이 진다고 해서, 그들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다시 오는 것입니다. 무덤은
looks like a prison, but it's really
release into union. The human seed goes
감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합일을 위한 해방입니다. 인간이란 씨앗은
down in the ground like a bucket into
the well where Joseph is. It grows and
땅으로 내려갑니다. 마치 요셉이 있는 우물로
내려가는 두레박과 같습니다. 그것이 자라나
comes up full of some unimagined beauty.
Your mouth closes here and immediately
상상할 수도 없는 아름다움을 발산하여 나옵니다.
당신의 입은 여기서 다뭅니다. 그리고 즉시
opens with a shout of joy there.
거기에서 기쁨의 외침을 위해 엽니다.
루미에게 죽음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과정이나 변천이 아니라, 새로운 문지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영혼을 일깨울 절회의 기회다. 인생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삶의 시선을 제공하고, 그 시선을 기꺼이 획득한다면,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 더 알게 된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1막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죽음이란 1막과 2막 사이의 고요한 휴식이다. 어머니에게로 돌아가 정신을 차리는 공간이자 시간이다. 루미는 죽음을 통해 자신의 신성과 합일하려고 안달이 난 인간이었다. 그는 죽음이 가져다주는 부활, 즉 ‘영원한 지금’을 약속하는 성스러운 구별경험에 목마르다. 만일 인간이 삶과 죽음을 모두 신의 선물로 여긴다면,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신나는 호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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