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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17. (木曜日) “담비”

영상

<설악면 북한강 숲에서 노니는 담비들>


2022.2.17. (木曜日) “담비”

오늘 신비한 손님들을 관찰하였다. 꽁꽁 얼은 북한강을 걷고 싶었다. 겨울이 물을 거대한 얼음 덩어리로 만들어 놓았다. 한참 북한강 위를 걷고 있는데, 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어디에선가 낙엽을 헤치며 높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동물들을 보았다. 저렇게 올라가는 동물은 족제비일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내가 3년 전에 보았던 담비들이었다. 담비는 한국멸종위기II급동물로 산악지대에 분포한 희귀종이다. 몸통은 가늘고 꺼리는 몸통의 2/3 길이로 몸은 황갈색 털로, 머리는 짙은 고동색이다. 침염수림에만 2-3마리 서식한다는데, 나는 오늘 6마리가 노니는 것을 보았다. 내가 이들이 족제비가 아니라 담비라고 확신한 이유는, 과거에 이 담비를 본적이 있고, 그것을 보기 위해 아이폰을 꺼내 멀리서 촬영하고 그 영상을 천천히 분석하여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것을 타인에게 말할 때, 그 타인은 내 말을 믿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은 자신이 처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형성된 하나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 자신에게 친숙한 사물과 사람, 그리고 이념들을 의지하고 믿게 된다. 누가 필자에게 무엇을 신봉하느냐라고 묻는다면 필자도 역시 자신의 경험 안에서 믿음의 대상을 찾으려 시도할 것이다. 우리가 신봉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에 대해 믿음을 가진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믿음’이라 하면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배타적인’ 믿음을 연상하게 된다. 특히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자신들만의 신앙체계가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다른 종교들에는 구원이 없다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특히 한국 종교지형도 안에서 믿음은 철저하게 이 배타성 위에 존재한다.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우리는 이런 광경을 쉽게 포착한다. 어깨에는 이동식 스피커를 매고, 손에 쥔 마이크에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목청이 터지라 외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 파괴적인 이단집단들과 일부 무식한 개신교 대형교회에서는 종교인들이 자기 자식에게 종교시설을 넘겨준다. 이런 집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들의 종파만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종교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존재로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을 바로 ‘무식(無識)’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무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다름’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 공부한다. 이 공부는 단순히 학교에서의 공부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자연의 오묘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배우는 혜안을 포함한다. 인간의 생존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능하다. 어린아이는 태어나면서 ‘어머니’라고 부른 존재를 절대 신뢰하게 된다. 그녀는 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그의 존재를 믿는다’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내가 어떤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말로 고백해 천당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그런 저급한 차원이 아니다.

기원후 302년 가을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우스가 시리아의 안디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로마관원이었으나 그리스도교인이었던 로마누스가 로마황제를 위한 제사를 방해한 적이 있었다. 로마누스는 그 자리에서 체포돼 화형선고를 받았으나 디오클레티우스는 그의 혀를 자르라고 명했다. 그는 약 10년간 로마제국의 동편에서 2만명의 그리스도교인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이 순교자들의 믿음은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존재 이유였다. 이 순교자들이 가진 믿음이 무엇이었길래, 유럽문명과 세계문명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나?

그리스도교에서 ‘믿음’에 해당하는 고전 그리스어 단어는 ‘피스티스’이다. ‘피스티스’는 사실 ‘어떤 교리나 사실을 믿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신뢰·충성·최선·위임’이란 의미다.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신이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그것을 믿으라고 강요한 적도 없다. 예수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보여준 행동들, 즉 ‘가난한 자·고아·과부,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을 자신의 몸처럼 보살피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에 옷을 주라고 주문한다. 또한 학연·지연에 얽매이지 말고 하늘의 새나 들의 백합처럼 자연과 더불어 살며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의 신비를 관찰하여 이 만물들을 존재하게 하는 아버지-어머니 같은 존재인 신을 의지하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자신의 일상에서 신비를 발견하고 그 안에 내재한 신비를 통해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매겨 행동하는 것, 바로 그것이 ‘피스티스’다.

제롬(기원후 342~420년)은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를 로마제국의 공인된 종교로서 그 위상을 마련하기 위해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는 ‘믿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명사 ‘피스티스’를 라틴어 ‘피데스’(Fides)와 ‘크레도’(Credo)로 번역했다. 라틴어 명사 ‘피데스’는 영어단어 ‘피델러티’(Fidelity)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는 ‘약속에 대한 엄수·충실·(배우자에 대한)정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의 태도이지 어떤 사실을 믿는 정신적인 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라틴어 동사 ‘크레도’(Credo)를 보면 원래 의미가 다시 한 번 강조된다. ‘나는 믿는다’라는 의미를 지닌 ‘크레도’(Credo)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심장’을 의미하는 ‘크르’(cr-)와 ‘우주의 질서에 맞게 삼라만상을 정렬하다’라는 의미인 ‘도’(do)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크레도’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란 뜻이다. 우리가 흔히 교리(Creed)라고 하는 것들은 ‘말로 하는 고백’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조망해 우주의 질서가 무엇인지, 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탐구해 그 사람의 체취로 묻어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의 사성제 팔정도를 말로 고백하고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깊은 묵상을 통해 알아내고, 그것들을 최선을 다해 심지어는 목숨을 바쳐 지키려는 삶의 태도이다. 11세기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캔터베리의 주교 안셀무스는 ‘Credo ut intelligam’이란 라틴어 명구를 남겼다. 직역을 하자면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인데, 그 의미는 ‘나는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것을 묵상을 통해 찾아내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그 결과 삼라만상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 되지 않을까.

오늘 아침에 담비 여섯 마리를 발견한 이유는, 내가 그 대상을 마음에 두고 기억에서 꺼집어 내,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과 사람, 그리고 삶을 움직이려는 원칙을 알려는 간절한 마음이 믿음의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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