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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30.(金曜日, 364/365) “까닭없이”

2022.12.30.(金曜日, 364/365) “까닭없이”

사람들은 항상 이유를 찾는다. 누가 선행을 했던 악행을 했던, 자신들이 아는 지식으로 그 연유를 분석하여 내놓는다. 인간에게 이유는 그 행위를 일으키는 힘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엄청한 일들은 이유가 없다. 3년전 코로나의 등장과 그 여파, 30만년전에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 6500만년전에 지구에 행성에 떨어져 공룡의 몰상, 50억년전에 원-화성과 지구의 충돌, 138억년전 빅뱅. 이 근본적인 사건들엔 이유가 없다.

신앙은, 그리고 삶에는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 신학자가 있다. 14세기 독일 호크하임에서 활동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까닭없이 사십시오!’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장은 당시 교황의 심기를 건드렸다. 1329년 봄, 아비뇽에서 군림한 교황들 가장 오랫동안 치리한 요한 22세는 독일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정죄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교황은 도무지 에크하르트의 삶과 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를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죄악의 길로 인도한다고 확신하였다. 특히 다음과 같은 에크하르트의 설교문이 그리스도교 사상에 위배된다고 실었다:

교서 8th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사람들, 명예, 이윤, 내면의 깨달음, 거룩함, 상, 혹은 천국도 구하지 않는 사람들, 다시 말하자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들, 심지어 자신의 것조차 포기하는 사람들, 그와 같은 사람이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입니다.”

교황의 그의 주장에 분노하는 것이 옳다. 하느님이 거룩함, 상, 혹은 천국을 흠모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소유까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을 영화롭게 한다는 에크하르트의 주장은 반신학적이며 반교리적이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가 독일의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신부였기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까닭없는 삶‘ 혹은 ’의지가 없이 의도하지 않는 삶‘은 그리스도교 윤리와 영성에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그가 당시 그리스도교에 위협이었던 이유는, 그는 산속에서 스스로 해탈했다고 주장하는 도인이거나 당시 이단으로 여겨지는 사상에 심취한 자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정통한 최고의 학자였고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의 글을 탐독한 자였다. 그는 성서 원문에 관해 독자적인 주석을 달만큼, 정통성을 인정받는 성서학자였다. 그의 파격적이며 기이한 주장은 서양 도덕철학사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의 호기심뿐만 아니라, 중세 신학과 철학이 더이상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일반인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교황의 교서는 에크하르트를 1326년 쾰른에 있는 주교가 주도하여 3년이나 끈 종교재판의 시발점이 되었다.

에크하르트의 주장은 단지 신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삶 전체에 관한 혜안을 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찾을 수 있다:

교서 16th

“하느님은 인간의 선행을 강요하지 않는다.”

교서 17th

“외적인 선행은 선하거나 신앙적이지 않다.

하느님은 그런 행위에 명령하지 않으신다.“

교서 18th

“외적인 선행은 우리를 선하게 만들지 않는다.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의 내면에 거주하시면서 우리를 양육시킨다.“

교서 19th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지, 선행을 사랑하시지 않는다.”

에크하르트가 남들에게 드러내는 선행을 모두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선행을 하려는 사람의 태도와 동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며, 후에 칸트 철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의 가르침이 교황의 분노를 일으켰다. 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까닭없이 사는 것’(live wihtout why)다. 이 사상은 후에 등장하는 니체나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이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에 반하는 주장이다. 이 논쟁은 이미 초기그리스도교부터 진행되어온 문제다. 인간이 행위로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믿음으로 받는가? 에크하르트의 주장은 후대 등장한 루터 종교개혁의 솔라 피데이sola fidei의 불씨가 되었다.

에크하르트 설교중 이 문장이 특히 교황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교서 20th

착한 사람이 하느님의 독생자다.

(Vicesimus articulus.

Quod bonus homo est unigenitus filius Dei)

이 주장은 현대에 와서야 이해하기 시작한 ‘놀라운 형이상학’extraordinary metaphysics다. 착한 일을 까닭없이 하는 자가 예수다. 사탄이 욥을 정죄하면서 한 말이 생각난다. “인간이 까닭없이 하느님을 경외할수 있습니까?” 까닭없이 사십시오!

사진

<야산에 널려 있는 잣나무 솔방울, 솔잎, 가지, 눈, 도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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