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9. (木曜日, 363/365) “하나”
자연은 자신을 방문하는 자에게 새로운 장면을 선물한다. 호랑이 허리와 같은 야산 등선을 넘고 넘었더니, 넘어진 전나무들이 우리를 반긴다. 오래전부터 이렇게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모든 나무는 언젠가 자신이 돌아왔던 땅으로 이렇게 드러눕기 마련이다. 시간이 걸릴 뿐이지, 모든 나무들은, 그렇게 자신이 태어난 땅으로 정해진 시간에 돌아간다.
넘어진 나무 가운데, 한 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이 나무의 상단은 오래전에 눈바람에 부러져 사라졌지만, 자신은 아직도 뿌리를 저 땅속 깊은 곳에 숨겨놓고 유유자적한다. 이 나무는 홀로 그렇게 서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권 8단락에 등장하는 ‘산비탈에 서 있는 나무’가 생각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이 나무는 여기 산비탈에 외롭게 서 있다.
이 나무는 인간과 짐승들을 굽어볼 정도로 높이 자라났다.
만일 그 나무가 말하기를 원한다 해도,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너무 자랐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은 기다리고 기다린다.
그러나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이 나무는 구름 거처와 가까이 살면서 최초의 번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은 한 젊은이 이렇게 말한다.
“그렇습니다. 차라투스트라여! 당신은 진실을 말했습니다.
나는 높이 올라가기를 열망하면서, 나 자신이 하강하기를 원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기다렸던 번개입니다. 보십시오!”
인간은 이 부러졌지만, 아직도 늠름하게 서 있는 나무다. 나무는 누구와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이 추운 겨울 아무도 찾지 않는 야산에서 자기 자신을 만끽하고 있다. 현재 지금의 자신의 모습은 언제나 최선이다. 그렇게 늠름한 이유는,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아는 것이 해탈이다.
우리는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로 갈길을 잃은 지 오래다. 19세기 인류는 허무주의虛無主義라는 병을 획득하여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씨를 뿌렸다. 허무주의는 삶에는 의미가 없으며, 세상은 인간의 최상의 희망과 가치에 냉소적이다. 인간의 고통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신이라고 불리는 의미는 없다고 주장한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보다 우월하며,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병이다.
허무주의가 현대사상의 시작같지만, 사실은 그 연유는 오래다. 허무주의는 서구인들의 가치와 이상의 궁극적인 결론이다. 서양철학의 시조인 플라톤은 진정한 세계, 즉 이데아는 저 너머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오감으로 인지한 이 세상은 가짜다. 그에게 이 세상은 ‘비커밍’Becoming이며, 그 배후에 변하지 않는 ‘비잉’Being이 있다고 설교하였다. 플라톤에게 삶의 의미는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탈출하여 현존 배후에 있는 형성을 찾아가는 것이 진리, 계몽, 고통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 철학을 이어받은 그리스도교는, 니체의 주장처럼, ‘대중을 위한 플라톤 철학’이다. 그리스도교 세계관은 플라톤 철학의 대중판이다. 플라톤철학처럼,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을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세계이며, 우리는 스스로는 구원할 수 없는 원죄라는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불완전한 존재다. 이 타락한 세상 너머에 진정한 세계인 천국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신자를 위해 마련되어있다. 플라톤 철학을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변형시킨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다. 플라톤 철학에는 그리스도교의 전지전능한 신은 없지만, 이 두 체계는 모두 자연과 초자연, 땅과 하늘, 왜곡된 형태와 원형을 전재로 자신들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예견하였고, 그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진정한 세계’를 희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사후에 등장하는 초월적인 하늘과 구원이 아니라, 후기-그리스도교 철학은 이런 세계가 인간들을 통해 이 땅에 뻔뻔스럽게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후기-그리스도교 ‘진정한 세계’를 ‘신들의 그림자’라고 지칭하였다. 그는 <즐거운 학문>에서 ‘신의 그림자’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붓다가 죽고 난 후에, 사람들은 수 세기동안 동굴에서 그의 그림자를 보여주었다. 그 그림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했다. 신은 죽었다. 인류가 지속되는 한, 천년동안 동굴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이 조작한 그림자를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의 그림자를 극복해야 한다.”
후기-그리스도교에 등장한 ‘신의 그림자들’은 무엇인가? 파시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가 니체가 말한 ‘신을 대치하는 그림자들’이다. 심리학자 융은, <발견되지 않는 자아The Undiscovered Self>라는 책에서 신하는 그림자를 확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가 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사회주의적 독재가 종교들이다.”
나치스 이데올로기는 아리아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설교하고, 카를 맑스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가 역사의 종말이자 목적’이라고 단언하였다. 우리는 아직 ‘신의 그림자’를 자처하는 러시아, 중국,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들의 행태를 경험하고 있다. 이 국가들은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설교한다. ‘신의 그림자들’은 근본적으로 염세적이다. 이들은 모두 ‘지금-여기’를 지옥으로 여기고 ‘개인’을 전체를 위한 대체 가능한 부속품으로 여긴다.
오늘 오후에 도산공원들 걸었다. 아침에 봤던 홀로 서 있는 나무와 같은 도산선생의 문구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 하나를 건전 (健全)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民族)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唯一)한 길이다.”
나는 ‘신의 그림자’에서 사람과 사물을 왜곡하는가? 아니면 ‘하나’인가?
사진
<가평 야산>
<도산공원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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