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7.(火曜日, 361/365) “신체身體”
영하 15도다. 마당에 서 있는 디젤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런 날일수록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몸이, 정신이고 영혼이기 때문이다. 몸이 움츠러들면, 그와 비례하여 정신도 영혼도 맥이 빠져, 하루를 흘려보내기 일쑤다. 스승님들을 모시고 야산으로 들어간다. 반려견들은 등산화도 신지 않았는데 거뜬히 산을 오른다. 이젠 거의 얼음으로 변한 딱딱한 눈을 디디고 야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반려견들이 내 삶에 들어온 시기는 10년 전이다. 날로 자라는 반려견들과 서울에 살 수 없어, 시골로 이사왔다. 그 덕에 50대를 편안히 살았다. 묵상하고 있으면, 어느새 반려견들이 내 곁으로 다가와 자신들도 기도한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는지 혹은 명상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샤갈은 항상 그 커다란 오른발로 내 허벅지를 찬다. 그리고 눈으로 말한다. ‘신체가 건강해야, 정신도 영혼도 맑아져요!“ 그러면 우리는 아침산책을 시작한다.
인류는 아직도 정신이나 영혼이 훌륭하다고 설교한다. 이 만고를 진리를 부수고 현대문명을 연 사상가들이 소로, 에머슨, 니체, 융, 다윈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네 번째 에세이에서 서양철학과 기독교가 무시해온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니체에게 육체는 인간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Aber der Erwachte, der Wissende sagt: Leib bin ich ganz und gar, und Nichts ausserdem; und Seele ist nur ein Wort für ein Etwas am Leibe.
“그러나 깨어난 자 (어린아이), 현자가 말한다: 저는 완전히 신체입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영혼이란 신체에 기생하는 어떤 것에 대한 단어일 뿐입니다.”
현대인은 스크린 안에 감금되어있다. 매일 매일 눈을 떠서 눈을 감을 때까지, 우리의 눈과 귀는 스크린에 매몰되어있다. 스마트폰, TV, 컴퓨터, 소셜미디어는 우리를 신체의 활동을 유리시키거나 마비시키고 스크린 안에 구현된 세계에 우리를 빨아들여, 정신분열이란 병을 선사한다. 신체와 정신의 괴리와 그 구별을 통해 구축해온 문명과 문화는, IT 혁신으로 강화되었고, 코로나 감염병 유행으로 고착화되었다.
성서에서는 신은 인간의 육체를 먼저 만들고, 그 안에 정신과 영혼을 상징하는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살아 숨 쉬는 신체’가 되었다고 기록한다. 신체를 건강하게 수련해야, 그와 비례하여 정신도 고양되고 영혼도 맑아진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 신체를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네페쉬nepesh는, 신체의 수준에 맞는 정신과 영혼을 담고 있는 전인이다.
영상을 기반한 기술들은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대치하였고, 신체와 정신의 양극화를 고착시켰다. IT기술은 시각을 감각기관의 유일한 승자로 만들었다. 시각 중심 사회의 개인들은 미디어에서 나오는 이미지의 수동적인 수용체가 되었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는 점차로 대면적이 아니라 이미지로 중재된다. 개인도 스크린을 통해 반영되는 이미지다. 손에 흙을 묻히고 사람들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감으로 상대방을 평가하지 않고. 누군가의 의도대로, 대부분 의도를 가진 허상을 보고 세상을 인식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실재實在가 아니라 재현再現이다. 영상기반 기술은 직업과 휴식에서도 몸과 마음을 분리시켰다. 우리 대부분은 하루에 8시간 이상 스크린을 보고 키보드를 친다. 신체의 일부는, 눈과 손가락만 움직이는 기형적인 동물로 점점 변해간다. 자연에 나가 두발을 움직이고 땀을 내면서, 생동하는 동물이나 식물을 보는 것이아니라, 어두운 방 안에서 비디오 게임을 하거나, 넷플렉스 영화 혹은 TV에서 스포츠경기나 트로트 경연을 본다. 이 활동들은 눈과 귀를 작동시키지만, 몸, 팔, 발을 마비시켜 결국 망가뜨린다.
정신분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괴한 몸 움직임이다. 몸, 팔, 발을 하루에 8시간이상 수년 아니 수십년 묶어놓은 사람이 정상일 리가 없다. 몸과 마음의 결별은 통찰력을 지닌 자아의 질식이다. 통찰은 정교한 생각의 흐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움직임의 자극을 받아 갑작스럽게 나오는 선물이다. 내가 태풍 태권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절실하게 느끼는 사실은, 이 아이들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태권도를 수련했기에, 내 강의가 그들에게 온전히 전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단테 <인페르노>를 신체 운동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청년들과 함께 읽고 공부한다. 이들은 파쿠르, 고공 다이빙, 수중 수영, 텔레노스, 유도, 요가등을 일생의 과업으로 수련하는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인페르노>에 등장하는 형벌을 받고있는 영혼들의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어, 우리 공부가 더욱 생생하다.
통찰洞察이 정신적인 활동이나 충분한 극한의 신체 움직임을 통해 나온다. 사지의 움직임, 들숨과 날숨, 맥박, 심장의 박동이 선명한 인식과 함께 전무후무한 통찰력으로 등장한다. 예들들어 통찰이란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다가왔다 사실을 아는 순리이고 밤이 가장 긴 동지는 낮이 가장 길어지는 하지의 시작이라는 섭리를 아는 상식이다. 스크린에 중독된 정신분열증 환자에겐 그런 상식이 없다. 우주와 지구가 오랫동안 생존한 문법을 망각하고 미로에 갇혀 비상적인 정신으로 무장하는 바보가 된다.
공부 만하고 놀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다. 바보는 몸 움직임이 둔하다. 독일철학자 포이에르바흐는 당시 유럽사회를 ‘기의보다는 기호를, 독창보다는 모방을, 현실보다는 재현을, 본질보다는 겉모습’을 선호한다고 질책한다. 현대인들이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록 고통을 받는 방식은 우리의 악행이나 허약함이 아니라, 우리의 병적인 환상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뇌리에 자리를 잡은 미디어 이미지로 불행하다. 신체는 위대한 현자다. 신체단련은 지혜의 시작이다. 몸 움직임은, 정신과 영혼의 유일한 훈련이다.
동영상
<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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