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4.(土曜日, 358/365) “생명수업生命修業과 영시英詩”
크리스마스 이브다.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동지는 12월 22일이지만, 진짜 동지는 오늘이다. 빙하시대 우리의 조상들은 겨울 한복판에서 추위와 허기에 기진맥진하여 생존할 수 있는 가망과 희망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삼일째 되는 날, 이 긴 밤은 죽음 그 자체였다. 팔레스타인의 목동이 양들과 함께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이젠 실오리와 같은 희망이 칠흑과 같은 절망으로 둔갑하시는 시점이 바로 12월 24일이다. 그 캄캄한 밤 하늘에서 이젠 낮을 길이가 길어진다는 복음을 알리는 전령이 있었다. 저 높은 하늘에서 죽어가고 있는 목동의 눈망울에 빛을 내보내는 북두칠성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바로 깊은 절망이 사실은 희미한 희망이라는 은유다.
오늘은 지난 태풍태권도 아이들 7명과 새로 공부에 합류한 2명 아이들과 ’생명수업‘을 하는 날이다. 원래는 격주로 일요일 오후에 진행하는데, 내일이 크리스마스 당일이라 하루 앞당겨 오늘 진행한다. 태풍태권도 아이들 나영이, 정현이, 설아, 민지, 윤서, 수연, 한별이, 그리고 원우와 수민이를 만나 함께 공부하는 것이 요즘 나에겐 한이 없이 기쁨이다. 7명은 지난 3년동안 리차드 바크의 Jonathan Livingston Seagull 전체를 암송하였고, 매일 묵상 일기를 써왔다. 이 아이들은 내가 발견한 수련생들중 가장 영적으로, 지적으로 뛰어난 학생들이다. 이들은 또한 지난 문대성컵 태권도 대회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한 무도인들이기도 하다.
원우와 수민이는 이 아이들과 생명수업을 Roberst Frost와 Mary Oliver의 영시로 진행하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지원하였다. 원우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만든 영화영상을 보내왔고, 수민이는 로버트 프로스의 Into his own과 The Road not Taken 암송영상을 보내왔다. 자신만만하고 감동적인 암송이다. 수민이는 나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자신은 홈스쿨링을 하고 있고 도스토에프키의 Crime and Punishment을 읽고 마음속에 무슨 울림이 있었는데, 그 울림을 찾고 있는 인간이라고 스스로 소개하였다. 나는 수민이를 생명수업에 초대하였다. 이 9명이 내가 발견한 밤하늘의 별들이다. 한명 한명의 인생을 통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을 목격하는 것이 내 삶의 즐거움이다.
내가 아이들과 생명수업을 진행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21세기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한데, 인간중심에서 생명중심으로 대전환을 요구하고있다. 생명을 지닌 존재들은, 저마다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지니고 태어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어나고 보니 누구는 인간으로, 누구는 반려견으로, 누구는 사과나무다. 인간 누구도, 현재의 자신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21세기에 선진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생명을 지니는 존재들, 즉 동물과 식물을 삶의 동반자로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코라 생명공부’는 자연 안에서 신의 섭리와 인간의 도리를 발견하고 오늘날 생명존중과 역지사지하는 마음을 고양시킨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자연에 관한 영시와 메리 올리버Mary Oliver의 반려견에 관한 시들 암송을 통해, 타자의 소중함을 이들의 시로 공부한다. 아이들은 내가 지정한 시들을 완벽하게 암송해 온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시를 알려주고, 즉흥적인 글쓰기, 그리고 토론으로 스스로 행복한 천재들을 발굴하기 위한 전인적인 교육을 실험한다. 온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국민 수업이 되면 좋겠다.
오늘 오후에 아이들과 공부한 영시는 Robert Frost의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와 Mary Oliver의 Conversations다. 독자 여러분도 조용히 읽고 희망의 별을 찾길 바란다.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from New Hampshire (1923)
by Robert Frost
<눈 내리는 저녁 숲 가에 서서>
프로스트는 이 시를 1923년 The New Republic이란 잡지에 기고하였다. 숲에 들어가면 그 안에 매력에 빠져 나오기 싫을 때가 있다. 샤갈이 그렇다. 벨라와 예쁜이는 산만한데, 샤갈은 소나무 밑에 앉아 자기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가만히 명상하는 도인과 같다. 내가 목줄로 끌면 버틴다. 프로스트도 잠시 동안 눈으로 단아하게 치장한 나무들과 그 풍광이 자아낸 매력에 빠져 가만히 서 있기 일쑤였다. 숲이 주는 아우라에 홀려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숲이 그 순간에 주는 아름다움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한다. 시인은,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으려는 샤갈과 빨리 집으로 내려가자고 재촉하는 나의 심정 모두를 품고 있다. 이 시는 프로스트의 가장 유명한 시인 The Road Not Taken에서 보여주었던, 똑같이 좋아 보이는 두 갈래 길과 만나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노래다. 자연의 위안이냐 혹은 집으로 돌아와 생계를 위한 의무와 노동이 팽팽하게 맞서 긴장한다.
시인은 도시를 떠나 잠시나마 평화를 선물하는 숲에 넋을 잃는다. 그가 있어야 할 본향은 숲이며, 눈 덮인 저녁은, 그 진실을 선명하게 알려주는 천사의 노엘이다. 숲은 천국에 가기 위해 단테가 반드시 들어야하는 ‘어두운 숲selva oscura’이다. 눈으로 덮인 숲은 춥고 어둡고 당당하고,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위엄을 지녔다. 시인은 밤이 성큼성큼 다가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을 수도 있다.
I.
Whose woods these are I think I know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이것이 누구 숲인지 알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집을 마을에 있어,
내가 여기 멈춰 서서 눈으로 가득한
그의 숲을 관찰하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해설)
시인은 시를 도발적으로 시작한다. 관계대명사 소유격 whose로 시작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소유지가 아닌 타인의 숲을 무단침입한다. 그러나 안심이다. 그는 이 숲의 주인이 마을에 집이 있어, 이 순간에 그가 숲에 들어가 그 아름다움을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안심이다. 그는 겨울 숲이 주는 평온平穩에 매료되었다.
평온이란 내재적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아 다른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면서, 자신에게 떨어진 운명에 대한 순응順應이자, 또한 그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면 초월하는 패기霸氣다. 내가 좋아하는 히브리 단어 ‘샬롬שָׁלוֹם’이 그런 뜻이다. 샬롬은,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행하는 인내가 가져다주는 심리적 안정이자 영적인 환희다.
이런 환희를 누릴 수 있는 기회는 흔치않다. 시인은 2행에서 ‘집’house와 ‘마을’village를 언급하며 인간이 구축한 인위적인 문명이 근처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문명과 문화의 성격은 공유가 아니라 소유다. 그는 내심 이 숲의 소유주가 있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인다. 그 소유주가 시인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이유는 숲에 내린 폭설暴雪 때문이다. 숲 주인이 멀리 떨어진 마을 집에 있기에, 시인이 숲을 잠시나마 홀로 즐길 수 있다.
II.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 queer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내 작은 말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이다.
근처에 농가도 없는데
일 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에
숲과 꽁꽁 얼어붙은 호수사이에 멈춰섰으니.
(어휘)
*queer 형용사 ‘이상한’
Deviating from what is expected or normal; strange
(해설)
시인은 이 두 번째 연聯에서, 자신과 동행한 말이 숲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이유를 헤아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일년중 가장 어두운 저녁’은 동지冬至를 의미한다. 혹은 동지와 같이 더 이상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을 상징한다. 시인은 생계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어, 눈이 덮인 숲이 주는 위안이 필요하지만, 말은 순간을 만끽하면서 살기에, 그런 위안이 필요없다.
시인은 말의 심정을 이해할 만큼 사려가 깊다. 말은 운송수단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이며, 대화상대다. 말은 시인이 숲 한가운데서 우두커니 서 있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 말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낙타와 유사하다. 주인이 지워준 짐을 목적지에 나르는, 영혼 변신의 첫 단계인, ‘부담負擔지기’다.
동지가 얼마나 추운지, 호수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다. 시인은 만물을 얼어 죽게 만드는 추위를 멈추게 하여 역설적으로 위안을 얻는다. 지금은 어둑어둑한 저녁이며, 이내 밤이 올 것이다. 숲의 밤은 치명적으로 위험하다. 가야 할 집이 멀기에 걸음을 재촉해야 하지만, 숲이 주는 위안을 금방 뿌리칠 수 없다.
III.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To ask if there is some mistake.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그(말)는 마구에 달린 방울을 흔들어
무슨 잘못이 있는지 묻는다.
그 외 다른 소리라곤 부드러운 바람과
솜털과 같은 눈송이의 흩날리는 소리 뿐이다.
(어휘)
*harness 명사 ‘마구馬具’
The gear or tackle, other than a yoke, with which a draft animal pulls a vehicle or implement. (Old Norse *hernest, from herr (“army”) + nest (“provisions”) (from Proto-Germanic *nesaną (“to heal, recover”))
*flake 명사 ‘얇게 떨어진 조각;’
A loose filmy mass or a thin chiplike layer of anything
IV.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과 깊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할 약속이 있다.
자기 전에 가야할 길이 멀다.
자기 전에 가야할 길이 멀다.
(해설)
시인은 평온이 영원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숲에서 시인을 유혹하는 평온이 흠모할 만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의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숲 밖에 그의 실력을 가름하는 진짜 경연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저녁이 지나 밤이 다가오자, 시인은 불안하다. 자신이 당장 길을 떠나지 않으면, 숲에서 잃고 목숨까지 위태해 질수 있기 때문이다. 숲은, 매력적이나 동시에 치명적이다. 그가 사용한 접속사 but는 마을에 그가 끝내야 할 심부름이 있다는 부담을 상징하는 단어다. 시인은 이 숲에서 사라질 수도 있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집으로 돌아가야할 길이 멀다. 시인은 마지막 두줄에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을 반복하였다. 사람들은 이 두행을 시인의 죽음과 자살에 대한 은유라고 해석한다.
오늘 저녁은 이 시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하고, 낮이 제일 길다는 하지를 향한 첫걸음으로 삼고 싶다.
사진
<12월 24일 아침 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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